기다림과 사랑
반듯한 바둑판을 닮은 시내 중심가 도로에는 서로 줄을 잘 맞춘 상가들이 올망졸망 서 있다. 가끔 바둑알이 하나씩 빠져나가듯 상가도 빠져나가고,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가지런한 바둑판 한 줄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에게 친밀도가 높은 상가들이 등장한다. 친환경 식품매장, 옷집, 커피숍, 꽃집 순으로 좁은 가로수 도로변에 하나씩 박혀 있어 볼일 보기에도 편하다. 장을 보러 친환경 식품매장에 갈 때마다 마음을 더 사로잡는 것은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어여쁜 마네킹이다. 장바구니를 든 채 무엇인가에 홀린 듯 옷집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마네킹처럼 예쁜 언니가 기다렸다는 듯 화사한 옷보다 밝은 표정으로 반겨준다. 나를 공주처럼 의자에 앉혀둔 채 커피 한 잔을 사준다며 바로 옆 커피숍으로 잠깐 사라지고 나면, 나도 모르게 신상의 옷 향기에 매료되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옷을 골라 눈으로 먼저 입어본다. 꽃 같은 옷으로 가득한 정원 속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기분은 꽃밭이 내뿜는 상쾌함보다 좋다.
옷 가게가 처음부터 제 주인을 만난 건 아니다. 가게에 들어가기만 하면 시선이 집중되어 감시받는 불편한 분위기였다가, 전업주부들의 참새 방앗간이 되어버려 어쩌다 드나드는 직장인은 이방인이 되는 분위기였던 적도 있다.
옷 가게는 제 주인을 못 찾은 듯 여러 차례 바뀐 후, 새로운 얼굴이 예쁜 마네킹처럼 쇼윈도에 비췰 때 호기심으로 들어갔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쨍한 노란 색깔의 큰 목도리가 마치 커다란 해바라기처럼 눈에 띄었다. 새로운 옷집 언니는 내 마음을 읽은 듯 몸통 만 한 목도리를 내 목에 몇 바퀴 돌려놓더니, 제법 멋스러운 코디를 연출해 내는 마술을 부렸다. 언니의 센스와 정성은 마음 문을 금방 열게 하였고, 이후 옷 가게가 나의 아지트가 된 지도 10여 년이 넘어갔다.
언니는 특별히 나에게 어울리는 옷과 악세사리 신발을 찾아다니느라 동대문 새벽 시장에서 발품 팔며 직접 공수해주는 매니저기도 하다. 마른 체격 때문에 옷이 크면 손바느질로 손수 옷을 줄여주기도 하는 수선사가 되기도 하고, 종종 이월상품을 깜짝 선물할 줄 아는 인정 많은 센스쟁이기도 하다.
내 표정만 보고도 피로도와 기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도통 군자이기도 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더 정확한 코디가 가능하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과감하게 입고 싶다고 우길 때는 냉정하게 벗게 하고, 어울리는 옷에 소심할 때는 과감하게 밀어붙이기도 한다. 피로한 날은 신축성 좋은 츄리닝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놀다 오기도 하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가장 엣지있는 주인공이 되도록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코디해준다.
반면 그녀의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을 직접 고르기 전에는 먼저 나에게 옷을 추천하는 법이 없기에 나에게 옷을 팔고 싶은지 그녀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비운 채 나를 대하는 그녀는 도인이다.
때론 권태로움으로 가끔 다른 옷집에서 사랑 뗌을 하느라 발걸음이 뜸하다 다시 찾아가면, 기다림을 아는 해바라기처럼 변함없는 환한 미소로 맞이한다. 곧추선 긴 줄기에 밝은 피부색이 돋보이도록 가지런한 꽃잎처럼 큰 키에 정갈한 용모를 가진 언니는 나를 향한 마음이 일편단심이다. 다른 꽃들이 옆에 함께 있어 주지 않아도 외롭지 않고, 더 예쁜 꽃이 견주어도 시샘하지 않는다. 존중하고 믿어주며 말없이 응원하는 마음 꼿꼿한 해바라기다.
마음 흐린 오후에 화사한 옷 꽃 한 벌을 사고 싶어 옷집에 갔다. 해바라기 언니가 다른 언니들로 바뀐 지 한 해가 넘어간다. 커피숍도 꽃집도 여전하며, 쇼윈도에 서 있는 오래된 마네킹이 그녀를 생각나게 한다. 이제는 새로운 언니들도 어느덧 나의 해바라기가 되어 나를 반겨 준다. 그리고ㅡ 나도 그들의 해바리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