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트테이프로 시작된 오해
남녀 반이 분리된 학교에 다니던 여고생 시절의 일이다.
이성 교제는 38선보다도 더 분명한 금지선이었고,
베를린 장벽보다도 높은 경계였다.
그 선을 넘는 순간
복도를 혼자 걷고 있던 어느 날
한 남학생이 다가와 쪽지 한 장을
손에 쥐여 주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밀려왔다.
“내일 야자 시작하기 전에 학교 정원 앞으로 잠깐 나와줘.”
“꼭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있어.”
나에게 작은 일탈의 유혹이 손을 내밀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오락가락하는 마음 사이에서
어느새 발걸음은 약속한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남학생은 카세트테이프와 예쁜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시절 학생들이 좋아하던 유명한 팝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친구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읽었다.
나는 잠시 일장춘몽에 빠졌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날 담임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나는 취조를 받는 피의자처럼 모든 일을 자백했다.
곧이어 남학생은 공범처럼 불려 왔다
남학생은 순진한 여학생을 유혹했다는 이유로
엉덩이에 매를 맞았고,
나는 그 장면을 한참 지켜봐야 했다.
남학생을 향해 막 싹트려던 호감은
나는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작은 호감 하나도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국어 시간이 되었다.
남학생의 담임이기도 한 국어 선생님 얼굴은
유난히도 붉어 보였다.
칠판 위 학습 목표가 묵직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성 교제에 대한 토론’
내 얼굴은 국어 선생님보다 더 붉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반 친구들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부정적인 의견이 나오면 숨이 멈추었다가
긍정적인 의견이 들리면 멈추었던 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그 이후 한동안 말 수가 줄어들었고
친구들이 많이 모인 곳에 머물기를 피했다.
기다리던 새 학년이 되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새로워지면
작아진 마음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는 순간
국어 선생님이었다.
이제 그 선생님이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되었다.
난 더 작아져야만 할 것 같았다.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기보다
피하는 데만 익숙해져 갔다.
다른 학생들을 칭찬하는 말도
나를 향산 비난하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몇 달을 버텨가던 어느 날이었다.
청소 시간에
유리창을 닦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다가와 한마디를 건네고 지나갔다.
“ 우리 00 이가 참 착하고 성실한 것 같아.”
“내가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나는 잠시 걸레를 든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는 다른 친구들처럼 마음껏 숨을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친구들 이름을 더 크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존재는
나는 딱 한 번 남학생에게 쪽지를 받았고,
다음날 카세트테이프와 편지 한 장을 받았을 뿐이다.
큰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나는 평가받고 흔들렸다.
국어 선생님의 한마디에
그동안 흔들리던 마음이 안정을 찾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 변화 하나로
나의 하루와 마음이 달라졌다.
그때 알게 되었다.
사람의 존엄은 사실보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더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나 또한 누군가를 내 시선의 기준으로
쉽게 판단하고 있지 않았는지,
천천히 나를 다시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