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왕언니

작은 권력의 기억

by 열음

중학생 딸이 화장하며 외출준비를 한다.

요즘 젊음의 놀이터인 홍대 문화를 즐기려는 듯하다.


문득 내 중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의 홍대 앞은

읍내 중심가에 있던 롤러스케이트장이었다.


서로 다른 중학교의 남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유일한 장소였다.



학교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나도

롤러스케이트장에 갈 때만큼은

작은 변신을 했다.

납작한 풀뱅 스타일 앞머리를

스프레이로 둥글게 말아 세우고,

입술에는 체리향 챕스틱을 발랐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롤러장 안으로 들어설 때면

콘서트장에 입장하는 가수처럼

가슴속 감성 리듬이 일렁거렸다.


천정의 미러볼이 천천히 돌아가며

롤러장 분위기를 더욱 화려하게 했다.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음악과 하나가 되어

친구와 손을 잡고 몇 바퀴를 돌았다.

관객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몸을 살짝 기울인 채

뒤로 타기를 능숙하게 하는 학생에게

시선이 쏠릴 뿐이다.


벽에 기대어 잠시 쉬는 척,

어두운 조명 속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을

슬쩍 탐색해보기도 한다.

가끔 스페셜 타임이 있다.

롤러스케이트를 잠시 멈추어 세우고

트랙 안쪽으로 댄스 무대가 만들어진다.


잠시 후

댄스 타임이 시작된다.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더 크게 울려 퍼진다.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널 그리며

Wake Me up Before You Go-Go


몇 명의 학생들이 무대로 나와 춤을 춘다.

뒤로 타기를 잘했던 학생들이

춤마저 잘 추면

호감지수는 급등한다.

나도 무대에 나가 춤을 추며

환호성을 받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쨍한 햇볕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롤러장에서 우리에게 함께 놀자고 했던

다른 학교의 두 언니가 표정 없이 다가왔다.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두 언니의 기선에 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외딴 야산까지 올라가 있었다.


더 차분하고, 더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 언니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엎드려뻗쳐!”

“...”



나와 친구들 네 명은

말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엎드렸다.

롤러장에서 함께 놀자며 다정했던 미소는

선도부 선배보다 더 무서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떤 친구는 동작이 서툴러 넘어졌고

어떤 친구는 울음을 터트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울지 않고 시키는 대로 움직였지만

짧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언니들은 여러 가지 동작을 명령했고,

우리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저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언니들은 두 명,

우리는 네 명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권위에 눌려

두려움은 컸다.




야산을 힘없이 내려왔다.

어떤 친구는 집에 가면

부모님에게 말하겠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말하자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조용히 들어왔다.




엄마는 내가 롤러장에 다녀온 사실도

야산에 끌려간 것도 모른 채

“빨리 씻어라.” 하고 말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씻고 저녁을 먹고

차분하게 숙제를 했다.

다음날 우리는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롤러스케이트장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추억의 롤러 스케이트장은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

일상의 작은 자유를 누리며

청소년 문화를 즐겼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낯선 왕언니를 통해

작은 권력과 두려움을 경험했다.

힘 있는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굴복해야 했고,

억울했지만 조용히 침묵해야 했다.

그날 나는

존엄이 위축될 때

사람이 자신의 경험마저

말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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