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에서 배운 존엄
나는 당연히
선택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부러움의 대상은
긴 머리를 한 무용반 여학생들이었다.
절도 있게 허리를 곧게 세우고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복도를 고고한 학처럼 우아하게 걷는 그녀들은
남녀 학생들의 로망이었다.
어깨 자락에 머리끝이 닿으면 안 되는
평범한 여학생이었던 나는
무용반 청소 담당이었다.
무용반 청소 시간이던 어느 날,
그녀들의 한마디가 나를 설레게 했다.
“발레에 어울리는 외모와 발을 가졌어요.”
그날 이후
무용 시간은 가장 기다리던 수업이 되었다.
숨겨진 빛을 품은 원석이
조금씩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가듯
말수가 적었던 나는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나의 마음을
몸짓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수줍음 많던 나는
울려 퍼지는 리듬과 하나가 되는 순간,
더 이상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번데기가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듯
나는 누군가의 시선 밖이 아니라,
내가 나로 서 있는 자리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존엄은 그렇게,
누군가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순간
조용히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가을 축제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무용선생님은
무용 잘하는 여섯 명을 선발하겠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의심 없이 나를 응원했다.
그 응원은 나를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믿음을 품고,
이름이 하나씩 불렸다.
익숙한 이름들이 차례로 호명될 때마다
나는 곧 내 차례가 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무언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막 날개를 달기 시작했던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준 앞에서
다시 접혀야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이미 바깥으로 밀려난 느낌이었다.
나 자신을 향한 물음이 되어
오랫동안 나를 붙잡았다.
가을밤 해 질 무렵,
야자시간의 자율학습을 뒤로하고
나만의 아지트를 찾았다.
학교 건물 뒤 테니스장 언덕배기에는
나처럼 외로운 들꽃들이
먼저 달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풀밭에 앉아
들꽃들이 바라보는 그곳에서
한참을 울었다.
다음날,
종례 후 남아서 무용 연습을 하던 친구들을 위해
나는 큰 칠판에 글을 남겼다.
“ 얘들아, 연습 열심히 해서
좋은 공연 보여주렴. 파이팅!!”
글을 쓰는 동안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비교도, 시샘도 아닌
진심의 울림이었다.
가을 축제의 날,
친구들은 예쁘게 화장한 얼굴과 화려한 의상으로
박수와 환호 속에서
그날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과 시샘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가슴속에서 조용히 눌러 담아
꽃으로 피워내야 했다.
어느 날,
무용 선생님은 뜻밖의 말을 남겼다.
“무용을 가장 잘하고,
무대에 어울리는 얼굴이야.”
그 말은 나를 위로하는 듯했지만,
오히려 더 깊은 물음을 남겼다.
안도와 의문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렇다면
왜 나는 선택되지 않았을까.
아주 가끔,
하늘을 스치는 별똥별처럼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기준은 정말 공정했던 걸까.’
나는 그 생각을 오래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그날 이후,
나는 나를 의심하는 대신
밤이 되어야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나의 존엄은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택되지 않았던 그날,
설명되지 않는 기준 앞에서도
이유 없는 배제 속에서도
그것이
달빛 아래에서
내가 배운 존엄이었다.
* 이 글은 '삶-라만상 1'에 실린 [못다 핀 달맞이꽃 '꿈을 가진 삶']을 존엄의 시선으로 다시 풀어낸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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