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왜 그랬을까. 조금 더 용기를 내볼 걸 그랬나. 아니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했나. 옛사랑 앞에서의 찌질한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 씩씩 얼굴을 붉히며 남몰래 이불을 뻥뻥 차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많이 있다. 자랑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누구라도 사랑 앞에서는 찌질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눈물겨운 구애가 되었든, 주체 못할 감정의 표출이 되었든, 관계를 향한 집착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다행히도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혼자만 찌질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고마운 영화들이몇 편 존재한다. 필자 또한 스스로가 심란해질 때마다 해당 영화들을 감상하며 심심찮은 위안을 곧잘 얻어가곤하니 정말 다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응? 그게 더 찌질한 거 아니냐고? 뭐 어때, 사랑 앞에서 찌질해지는 게 죄는 아니잖아.
사랑하는 그녀를 향한 눈물겨운 구애,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검은 머리 아가씨를 남몰래 좋아하는 선배는 오늘도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연을 가장해 '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를 목표로 하는 작전, 일명 '최눈알' 작전의 시행을 위해 쉴 새 없이 구차한 노력을 펼치는 선배. 하지만 검은 머리 아가씨의 속내는 쉽사리 알 수가 없다.
'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라니. 이보다 찌질하고 소극적인 구애 방식이 또 있을까. 하지만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심정도 일정 부분 이해할 수밖에 없으리라 믿는다. 과연 상대 또한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내가 호감이 있다는 것을 상대가 눈치채고 있는 것인지, 나의 호감이 괜한 부담이나 맥락 없는 들이댐처럼 비춰지지는 않는 것인지, 머릿속에서 이런 고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다가가는 방식이 조금 찌질하면 어때. 이런 식으로라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상대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겠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영화다. 찌질한 사랑이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이다. 필자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진실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라도 믿고 싶다.
정말로 나만 이렇게 구차한 거야? <러브픽션>
31살 평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소설가 주월. 그런 그의 앞에 모든 것이 완벽한 여인 희진이 나타난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끝에 마침내 희진과 연인으로 발전하는 데 성공한 주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완벽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희진의 단점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관계의 진전과 감정의 농도가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 법이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만 느껴졌던 상대일지라도, 관계가 점점 깊어져 감에 따라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단점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상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제멋대로 콩깍지에 씌어 상대를 마치 나의 이상형인 것처럼 재단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가 가지고 있는 예상치 못했던 면모에 끊임없이 실망해버리고 만다.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실망하는 것만큼 구차하고 찌질한 심리도 없을 터인데, 우리는 그러한 심리로부터 도저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러브픽션>은 이러한 우리의 구차함과 찌질함에 대하여 대신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아주는 고마운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자신의 구차한 면모를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풀어 설명해내고자 하는 '주월'의 궤변을 듣고 있자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공감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의 끝이 감정의 끝은 아니잖아, <우리 연애의 이력>
화려한 재기를 꿈꾸는 여배우 연이와 영화 감독을 꿈꾸는 만년 조연출 선재. 두 사람은 짧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부부 관계의 끝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서 서로의 곁에 남아있는 두 사람. 과연 연이와 선재의 관계는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 걸까?
뭐니 뭐니 해도 사랑 앞에서 가장 찌질해지는 순간은 결국 지나가버린 관계에 대한 집착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집착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게 겪어야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관계의 끝이 결코 감정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 또한 관계와 같이 딱 잘라 끊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법이다.
<우리 연애의 이력>은 우리의 관계가 반드시 감정의 거울상과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영화이다.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반드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며, 반대로 두 사람 사이에 지속적인 감정의 교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다른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속단할 수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감정과 관계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위태로운 줄타기를 이어가야만 하는 신세인지도 모른다. 분명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하고 싶은 것뿐인데, 세상은 그마저도 쉽게 허락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