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남재희: 지영아.. 지영아..
문지영: 왜애.
남재희: 언제까지 잘 거야. 해가 벌써 떴는데.
문지영: 아까부터. 근데 왜 그렇게 자는 사람 얼굴을 빤히 보고 있어?
남재희:... 좋으니까 그렇지. 이뻐니까.
문지영: 해장하러 가자.
식당
남재희: 이것도 너 먹어.
문지영: 너 먹어. 살코기를 다 주면 어떡해?
남재희: 앞으로 평생 줄 건데?
문지영:.... 재희야. 너 어제 그 말 진심이야?
남재희: 어? 어... 야 넌 부끄럽게 밥 먹다 말고 그런 소릴 하냐.
문지영: 나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남재희: 못할 거 있나?
문지영: 돈은?
남재희: 어?
문지영: 돈은 모았어? 결혼하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알아?
남재희: 알지. 그래서 앞으로 계속 글 쓰면서 모을 거고.
문지영: 그럼 우린 다 늙어서 결혼하겠다. 아니 어쩌면 못할 수도 있겠네
남재희: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문지영: 결혼은 현실이야 재희야. 그렇게 이상 속에서 허우적대다간 이도 저도 안되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볼까? 너 이렇게 계획 없이 말하는 거.. 답 없어 보여.
남재희: … 여태까지 나 만나면서 그런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문지영: 넌 내 상황 모르잖아. 난 너처럼 편한 소리 하면서 못살아.
남재희: 너 상황 뭐. 그리고 그게 뭐 어쨌는데? 있잖아 지영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고 적어도 나한테 사랑은 편안하고 행복한 거. 그게 전부야. 근데 넌 사랑한다는 말을 참 아프게 한다.
문지영: … 그래, 나 이상해. 그니까 나 버리고 가.
남재희: 하… 장난해?
문지영:...
남재희: 지영아.. 내가 뭐 잘못한 거야?
문지영: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나 혼자 내버려 둬.
남재희:... 뭘 감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준비되면 말해. 서울에서 보자
문지영 조용히 운다.
이준학 등장.
이준학: 지영 씨! 제가 말했잖아요, 해결할 수 있다고. 좋은 날 왜 울어요?
문지영: 고마워서요..
이준학: 그럼 지영 씨도 저한테 선물 줄래요?
문지영:... 네?
이준학: 대답해 주기로 했잖아요. 나 그때 말했던 거, 빈 말 아닌데.
문지영: 누가 돈 빌려주면서 결혼하자 해요..
이준학: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야죠! 도망 못 가게 내가 꽉 잡아둬야지.
문지영: 준학 씨는 제가 왜 좋아요? 준학 씨 좋다는 여자 많을 텐데.
나는 예쁘지도 않고, 직업도 변변치 않고, 집도 안 좋은데요.
이준학: 저는 30대 중반에 결혼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이때 만나는 사람이 생긴다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고요.
문지영: 그럼 나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거네요.
이준학: 그런데 지영 씨 말대로, 나 좋다고 하는 여자 많았어요. 내가 선택한 건 그중에서 지영 씨고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에요. 미룬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고요. 지영 씨의 직감을 믿어봐요! 지금 속에서 나한테 가라고 외치고 있지 않아요?
문지영: (웃음)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이준학: 또, 또!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죠. 지영 씨. 사람은요, 모든 일을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것 같이 굴지만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나는 시간을 계획합니다. 일분일초라도 더 삶을 즐기고 싶어서요. 내가 이런 상황에 지영 씨한테 청혼하는 것도 우습게 들릴 수 있어요. 그런데요, 나는 지영 씨가 이렇게 힘들 때 나한테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거, 또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거. 이게 우리 사이의 굉장한 발전이라고 봤습니다. 가족도 믿지 못한다는 요즘 세상에, 믿을 구석이 생긴다는 거잖아요. 난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지영 씨 곁에 있고 싶어요. 그러니까 결혼해요. 나하고.
문지영: 이준학은 나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은 걸까요? 그렇다면 결혼에 사랑이 필수적인 걸까요?
어차피 사랑 없이 결심한 결혼, 저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상부상조 아닐까요..
... 생각할 시간을 줘요. 세 달만.
이준학: 그렇게 오래 생각해 봤자, 답 안 나옵니다. 한 달로 합시다.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 주셔야죠!
문지영:...
이준학: 지영 씨, 오래 고민하지 말아요. 그냥 믿어요. 지영 씨를.
이준학 퇴장한다.
문지영: 한 달.. 저는 그렇게 한 달을 벌었습니다. 결정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지옥이라 했고, 사랑만 있는 결혼은 환상이라 하더군요. 그럼 무엇을 택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바랐던 일이 눈앞에 있는데 왜 잡지를 못할까요..
굳게 잠긴 동생의 방을 쳐다본다.
문지영: 문지훈..
동생의 방 앞에서 오랫동안 서성이다,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문지영:... 가끔은 네가 부럽다. 너만의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 네가.
너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다 배척하는 너만의 생존방식.
가만히 있으면 엄마나 누나가 다 처리해 줄 것 같지?
아니야, 너는 나와야 해. 네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해.
죽여. 죽일 거면 죽이고, 돈이 필요하면 막노동을 뛰든 신장을 팔든 다 너 알아서 해.
엄마한텐 너도 아빠 닮아 집 나간 거라 할 테니까. 그 피가 어디 가겠니?
나와, 당장 나와!! 엄마 인생으로 모자라 나도 돈 몇 푼에 팔아치울래?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네 생을 붙잡으라고!! 어떻게 그렇게 살아?
(그만 주저앉아 버린다.)
아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냐...
엄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그 수순을 그대로 밟게 되는 것 같아, 답답해.
참 이상하지, 엄마의 삶은 결혼으로 망가졌는데
나는 또 결혼으로 해답을 찾으려 하다니 말이야.
그리고 그게 이렇게 나에게 감옥같이 느껴지다니.
그래, 나에게도 아빠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이 선택이 답답한 건 당연한 거야..
12_걸어서 세계 속으로 파리 IN 지영 : 당연한 거야 듣고 인
13_걸어서 세계 속으로 파리 FADE OUT 지영 대사 시작하면 아웃
엄마 방에서 티브이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오늘도 <걸어서 세계 속으로, 파리>. 파리에 가보고 싶냐고 물어도, 입 아프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죠. 난 엄마의 손을 바라봅니다. 엄마는 많은 것을 잃었어요. 있어야 할 흔적들. 지문, 남편, 인생 같은 것들을요. 엄마는 결혼을 선택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엄마. 엄마가 생각한 결혼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겁니다. 엄마는 엄마 자신을 지옥으로 넣어버린 거예요. 세상이 저렇게 넓은데, 결혼이라는 선택으로 두 번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나는 나의 길을 갈 거야. 너도, 나올 준비를 해. 세상과 맞설 준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