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

by 박해경

내려놓지 못해서 무너지는 삶도 있다.

지금의 나를 가장 무겁게 하는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과잉이었다.


사람은 위기에 놓이면 더 많은 것을 붙잡으려 한다.

불안할수록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과잉이라는 사실을. 너무 많은 기대, 너무 많은 역할, 그리고 너무 오래 유지해온 체면이었다.

내려놓는다는 말은 언제나 추상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인 선택의 연속이다. 모든 연락에 즉각 답하지 않는 것, 더 이상 무리한 약속을 만들지 않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것. 이런 사소한 결정들이 일상의 밀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체면은 가장 늦게 내려놓게 되는 짐이다. 잘 살아온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관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기준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괜찮은 척하는 습관은, 오히려 회복을 늦춘다. 체면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크고, 그 에너지는 대부분 불안에서 나온다.

나는 오랫동안 ‘지금은 잠시’라는 말을 반복하며 버텼다. 곧 괜찮아질 거라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내려놓지 못한 채 유지한 일상은 점점 나를 소진시켰다. 회복을 미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 버티는 것이다.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속도, 나에게 꼭 필요한 관계의 수, 그리고 혼자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시간. 삶은 늘 확장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어왔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축소를 통해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다.

그건 방향을 다시 맞추는 일에 가깝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야, 중요한 것이 또렷해진다. 예전에는 성취가 나를 설명해주었지만, 이제는 선택이 나를 설명한다. 무엇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가,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만큼 중요해졌다.

이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붙잡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필요한가. 전환기의 한가운데에서, 내려놓음은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아직 완전히 가벼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방향은 분명해졌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겠다는 것. 삶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조율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이 연재는 잘 내려놓기 위한 기록이다.

더 잘 버티기보다, 덜 무겁게 살아보기 위한 시도. 내려놓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체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더 잘 버티기보다, 덜 무겁게 살아보기로 했다.

내려놓지 않으면 끝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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