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꼭 했던 일중에 하나가 밭에 가서 빨간 고추 따고 따모은 고추들 여기저기 살피면서 상처 입은 고추나 벌레 먹은 고추를 골라내는 일이었다.
애초에 밭에서 따담을 때 잘 구분해서 따 담으면 되는데 해보면 알 테지만 그게 말처럼 되지 않는다
햇볕이 따가워서 이기도 하고 고추나무에 빽빽이 달려있는 고추 중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는 게 쉽지 않다. 계속 고추만 보다 보면 이게 따도 되는 정도 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해지기 시작하고 그 몽롱함에서 고추를 따다 보면 초록고추도 빨간 고추로 보여서 정신 차리고 잘 구분해서 딴다고 해도 다 모아놓고 보면 빨간 고추, 초록고추, 썩은 고추, 말라비틀어진 고추, 고추나무 가지며 어떨 땐 고추나무가 뿌리째 모아둔 고추더미에 함께 있는 게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점심때쯤까지 고추를 따고 점심 먹고 햇볕이 쨍쨍할 시간에는 마당 나무아래 평상에 둘러앉아 고추 무더기를 다시 한번 구분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근데 참 재미있는 건 그늘아래 앉아서 골라내는 일이다 보니 분명 고추밭에서 햇볕아래 쪼그려가며 하던 아침일보다 훨씬 수월한 것일 텐데 어찌 된 영문이진 아침 고추 따는 일보다 일이 녹녹지가 않다.
점심 먹고 졸리기도 하고 벌써 아침일을 한터라 일이 지겹기도 하고 앉았으니 눕고 싶기도 하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 보니 지레 실증이 난 거기도 해서 고추무더기 정리를 할 때면 언제나 게으름을 피우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엄마는 늘 얘기하셨다.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니 싫든좋든 이왕 하는 거 기분 좋게 해라! ”
이 말이 어떨 땐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하기 싫은데 웃으면서 어떻게 하냐는 거다.
짜증도 내고 온몸을 비틀어가며 구시렁거리기도 하고 고추 하나 잡고 하세월이기도 하고 하지만 엄마는 콧노래를 부르시며 아주 열심히 하셨다.
한참을 주리를 틀다 주리 트는 것이 지겨워지면 게으름 피우는 걸 포기하고 다시 고추 다듬기를 시작하고 그렇게 한 두어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면 마당에 마적을 깔고 그 위에 골라 담은 고추를 풀어 서로 겹치지 않게 골고루 펼쳐서 깔아 둔다.
그리고 해거름이 되면 깔아 두었던 고추를 쓸어 담아 평상 위에 두고 마루에도 두고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반복하면서 매일매일 한두 번은 뒤적여가면서 고추 상태를 확인하고 그중에 또 상태가 영 시원찮은 것들을 골라내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물기 충만하던 고추가 시들시들 물기가 빠지고 어느 정도 뻐덩뻐덩 해지면 부피도 많이 줄고 해서 방안이랑 마루에다 펼쳐놓고 또 말린다.
이때쯤 되면 고추의 매콤한 냄새가 집안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집 전체가 고추지옥에 빠지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빈번하게 고추벌레들의 출몰에 기겁을 하기도 일쑤이다.. 그렇지만 이 지겹고 징그러울만치의 일손을 끝 마치고 나면 그 덕에 겨울나기준비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미룬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을 신세 한탄하며 죽상이 되기보단 콧노래 흥얼거리며 그 흥겨움에 손가락 춤을 추며 기꺼운 마음으로 내 껏이라 여기면 이 고달픈 노동도 기꺼운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엄마는 열심히도 가르쳐 주셨다.. 그 덕에 나는 절대 긍정대마왕이란 별명과 함께 긍정공산당이라는 호를 갖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은 참 살 만하고 참 재미나다..
나는 담 생에도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