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클래식클라우드 12] 피츠제럴드"를 읽고
클라우드 클래식 피츠 제럴드? 처음엔 웬 맥주 이름만 두 개가 보였다. 도대체 뭐하는 책이길래.
'아, 위대한 개츠비 작가 이름이 피츠제럴드였구나.'
그냥 그렇게 책을 읽어 나갔다. 위대한 개츠비 영화도 봤고(레오 주연) 책도 읽어봤지만 (이건 아이북스 영문본을 읽었던 게 문제) 오래 전이기도 해서 큰 인상은 없었기에, 특별히 그의 작품내용은 의식하지 않으며 책을 읽었다. 최민석씨의 여행기가 LA를 넘어 볼티모어 일정까지 마칠 즈음, 나는 이미 인간극장-피츠제럴드 편의 가장 적극적인 방청객이 되어 그의 삶에 함께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왠지 가끔은 너무 처량해 술독에 빠진 그의 일상에 위스키병 말고 초록빛 소주병이 그려지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 안타까운 모습에 레오 주연의 개츠비가 자꾸 오버랩되었다.
'이건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마저 읽어봐야겠다.'
그렇게 넷플릭스를 틀었다. (마침 집에 LG 4K UHD 49인치 티비가 생겼기에!!) 그리고 나는 영화 보는 내내 개츠비의 모습에서 피츠제럴드를 보았다. 영화 속 화려한 파티는 그의 이루지 못한 이상이었고, 개츠비의 진심어린 말은 귀담아 듣는 이 없던 그의 쓸쓸한 독백이었고, 개츠비의 불안한 모습은 계급 앞에 작아지던 그의 자아였으며, 결국 둘의 말로는 똑같이 the poor son of a bitch 그 자체였기에, 영화의 마지막에는 조금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엉엉 울진 않았고) 모르겠다. 괜히 도깨비보다 개츠비가 더 쓸쓸하고 찬란한 것 같아 여운이 남았다.
'아, 한 사람의 인생, 이리도 힘들고 안타깝구나.'
왜 그의 인생에 내가 이렇게 이입하고 안타까워 하는지 공감을 못할 수도 있다. 사실 그렇다. 그의 인생에 대해 여행지를 통해 짧게 다룬 책 겨우 한권을 읽어보았다. 이걸로 내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지. 그렇다면, 작가가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에 대해 얘기했듯, 내가 "피츠제럴드는 과연 쓸쓸하고 찬란했나"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얘기해보고 싶다. 쓸쓸한 건 빼박 같아 보이기에 이견의 여지가 없겠지만, 그래도 재즈시대에 태어난 그의 찬란한 분투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거 같아, 세상이. 혁명이란 것은 뭔가 부서뜨려야 될 대상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그게 뭔지, 혁명을 통해 깨뜨려야 되는 것이 뭔지 파악하기가 힘들고 복잡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위 인용은 영화 기생충이 계급차이로 인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인지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답변이었다. 이 인터뷰를 봤을 때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정말 그랬다. 영화 기생충은 분명 가슴 통째로 먹구름을 뒤덮는 뚜렷한 비극이었는데, 생각해보면 명확하게 악역이라 지목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냥 모두가 어느정도 각자의 잘못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계급으로 인한 불평등은 당연히 불합리한 것이다. 과거에는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그러한 불평등이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계급개념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다. 각자 계급의 역할은 명확했고 모두 그것이 자신의 소명인양 살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사람과 혼인하고, 교류하고, 함께 일했으며 사실 불평등을 크게 체감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상류계급의 호화로운 삶은 그저 태생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체념하면 편했을 테니까.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제도는 없어졌다. 오늘에 본인이 전주 이씨이니 이성계의 후손이라고 엣헴엣헴- 거리면 분명히 좀 모자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체감할 수 있는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이라는 계급개념은 자본이라는 이름 하에 분명히 나뉜다. 하지만, 여기에 모두가 합의하는 분류점은 또 없다. 나는 누군가에겐 하류층, 누군가에겐 중산층, 또 누군가에겐 상류층일 수도 있다.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계층은 모두 한 곳에 어우러져 지낸다. 불평등의 체감은 더 크고 그 형태도 더 다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불평등 안에서 우리는 불안감과 조바심을 느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정말 나쁜점은, 그 불평등의 탓을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개인에게 돌린다는 점이다. 사회는 실패한 자를 섣부르게 속단하곤 한다.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데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결정적으로 자본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탄생했던 공산주의는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자본주의는 더욱 정당성을 얻었고, 부서뜨릴 대상은 이미 없으니 혁명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마르크스적 색채가 너무 강한데 나도 달콤한 월급으로 커피 사마시고 문화생활 하고 맛있는 거 사먹는, 자본주의를 한껏 향유하는 사람이다. 단지 자본주의가 정신적으로 해로운 점을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에는 그래도 자본주의가 여러 부작용(대표적으로 1929년 경제대공황,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을 겪으며 그나마 중화된 체제인 후기자본주의/수정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재즈시대 때는 아마 고전자본주의의 절정기였을 것이다. "자본 한번 잡숴봐~ 얼마나 달콤하게유~ 맛도 좋고 탈도 안나유~ 못 먹으면 바보~" 사방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이러한 시대에 부모님으로부터 자본적/교양적 상승욕을 동시에 물려 받아 태어난 피츠제럴드는 어쩔 수 없이 많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에게 상승이란 삶의 완성을 향해 필수불가결하게,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하는 길이었을텐데, 가는 길목마다 높은 벽을 마주했으니 삶이 아주 지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벽을 탓할 수 있었는가. 그 벽은 자본주의가 정당화 시킨, 그냥 존재하는,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현상일 뿐이었고, 그 벽을 어떻게든 넘는건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다. 못넘으면? 그저 다시 심기일전하여 일어서야 했다. 더군다나 그는 항상 사랑에게 버림 받던 프로차임러 아니었던가. 친구는? 얼마나 밉상이었으면 학교에 [피츠제럴드 독살 구인 광고]가 붙었겠는가. 대학시절에도 결국 프린스턴에 완전히 섞여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헤밍웨이랑 친했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왠지 대체로 갈굼당하는 역할이었던 것 같다. 아마 많은 순간에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그렇기에 술에 의존한 그의 삶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을 분투했다. 그의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본인이 데이지를 놓쳤던 역사를 그냥 잊고 살면 위대해질 수 있겠지만, 데이지를 되찾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는 듯 얘기했었다. 하지만 데이지를 잊으면 그가 위대할 수 있었을까. 겉으로 화려해도 속은 비어 있는 그냥 밀주업자 아니었을까. 데이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초록빛으로 개츠비를 밝혀주었고, 그로서 그는 위대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츠제럴드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상승동인은 세계를 정복하는 폭군이 되는 것이 아니었지 않은가. 그는 단지 한 여자에게 사랑 받고 싶은 남자였고, 대중에게 인정 받고 싶은 작가였으며, 사교계에서 인기 있고 싶었던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이 뭔가 쓸쓸하고 찬란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허영스러웠지만 실상 다소 소박한 것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한 삶이기에. 마치 개츠비가 그의 재산이 아닌 데이지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위대할 수 있었던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