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을 읽기 전에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본다. 존재자는 원인이 지정해준 목적으로 인해 발생하고, 결과라는 현상로서 존재한다. 일례로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을 보겠다. 노트북은 인간의 기록적, 열람적, 산술적, 그 외 무수한 기타 편의를 위해 제조되었다. 제조된 결과로서 지금 나의 글쓰기 활동을 돕고 있다. 이로서 나의 노트북은 정의되고 존재한다. 여기 존재에서 원인이 빠진다면 애초에 이 노트북은 제작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과가 빠진다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플라스틱 폐기물로서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사물이라는 존재는 인간에 의해 완벽하게 정의되고 완전하게 통제되는 느낌이다. 인간은 부분적으로 신의 힘을 얻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로 돌아와본다. 좀 더 범위를 좁혀서 "나"라는 존재를 조명해본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내 생각은 섣부르게 가지를 뻗지 못한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으로 인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원인은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탄생의 목적에 대한 답은 내리기가 모호하다. 세상을 바꿀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 아니면 그저 사랑받기 위해서? 반대로 사랑을 주기 위해서? 답을 내리기가 힘든 것을 넘어서서, 애초에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피투된 존재라고 얘기했듯, 나는 목적 없이 이세상에 태어난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의 결과 자체에 대한 관찰 및 규정은 그래도 어느정도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파악과 이해는 오랜 기간 고도의 자기객관화 및 성찰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내가 탄생한 목적에 대한 무한한 모호성에 비교했을 때 이해가능성이 충분하다.
하지만 이를 좀 더 철학적 영역으로 옮겨와서 내 존재의 결과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 즉 존재의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하면 나는 다시 생각을 뻗치기 조심스러워진다. 자기 존재의 목적을 좌우명 마냥 확고히 설정하고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목적을 잘 수행하는 것일까? 이는 분명 우리 인생의 빈칸을 채워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나는 이것이 결코 답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존재 목적의 무한한 모호성 때문이다. 주관은 외부 세계와의 상호교류 아래 끊임없이 그 경계를 확장하고 축소하며 허물어지고 다시 탄생하기를 반복한다. 변화하는 주관은 스스로 설정한 존재 목적을 바꿔놓을텐데, 바뀌게 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허무주의를 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사실 인생 목적지의 변경보다 더 두려운 부분은 목적지에 대한 선악적 판단이다. 외부 세계는 수시로 나의 목적지를 향한 수행길에 간섭하여 옳고 그름을 논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부분을 세상이 부정할 수도, 세상이 옳다고 믿는 부분을 내가 부정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무수한 충돌과 인생의 모순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평생을 관철하고 굴복하기를 반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 고행길의 중압감은 절대 사소하지 않기에 불안을 야기한다. 물론 자신이 얼마나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견지하느냐에 따라 이겨낼 수도 있다. 니체의 초인사상이 끼어드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초인은 철저하게 고독하고 스스로에 몰두해야 하는 존재인데, 가뜩이나 자본의 홍수 아래 철학이 부족한 현대사회에서 초인이 과연 몇이나 탄생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공허하며, 외롭고, 방황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스스로 규정한 정체성을 하나씩 벗겨내어 존재라는 거대한 화두 앞에 맨몸으로 섰을 때, 우리는 그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론적 고민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라는 존재 외의 존재자를 채워넣는다. 소유가 존재론적 고민을 대체하는 것이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과 더 적극적으로 연계하며 나를 규정하고, 물건을 소유하며 나를 꾸며낸다. 현대사회의 고도화된 마케팅으로 인해 브랜드 소비를 통한 정체성 규정 자체가 더욱 쉬워지기도 했으며, 요즘엔 소비를 통해 본인의 가치관 및 사상까지 표시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물건을 소유하고 소비하며 규정하는 정체성은 본질 없는 껍데기 같고 어딘가 공허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에 매달리기도 한다. 그것이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한 위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해지면 집착이 된다. 타인이 물건마냥 마음대로 소유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인간 존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함께 살아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집착은 보상성 없이 상실감, 실망감, 배신감 등 다양한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주게 되며, 그렇게 인간은 다시 한번 공허해지고 방황하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인간은 여기에서 신이 될 수 없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 존재를 소유하려 노력한다. A.I라는 주제를 다루는 공상과학 영화에서 이러한 우리 욕망이 비춰지며, 발생하는 갈등, 모순 및 여전한 공허감도 미리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모호한 두 단어인 "소유"와 "존재"에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 적어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에 관해서라면, 나는 니체의 초인사상과 데미안의 투쟁정신을 우선 답으로 정했다. 나에게 내재된 의지의 힘을 믿고 세상을 스스로 정의하며 그에 맞춰 걸어보려 한다. 물론 이 길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멈추지 않는 불안감을 동반해야 할테지만, 그래도 그냥 익숙해지는 것이 최선 아닐까 싶다. 소유에 관해서라면, 나는 사물이 내 존재를 채워주는 부분은 아주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타인이라는 존재를 소유한다는 것이 불가능함과 그를 기대했을 때 야기되는 실망감의 유해성은 인생 전체의 경험을 통해 반복해서 확인한 결론이다. 그러므로 내 존재는 자아확장 및 강화를 통해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자기 자신과 외부세계에 대한 잦은 인지 및 이해가 중요할 것이다. 이래서 공부는 평생하는 것인가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거대 담론을 책 제목에 담았다. 오늘 같은 고민 뒤 딱 안성맞춤인 책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