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 남아있는 나날"을 읽고
스티븐스씨. 사실 다 알고 있었지 않습니까.
부친이 노쇠하여 역량 밖의 일을 하느라 저택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그 나날에 밀어붙이던 자신의 고집을.
달링턴 경이 유대인 하녀 두명을 내보내야 한다고 했을 때, 뭔가 도리에 맞지 않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켄턴 양이 이모를 여의고 울고 있던 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고 싶었던 당신의 마음을.
켄턴 양과의 마지막 코코아 모임에서, 당신의 알량한 마음에 속마음과 다르게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음을.
켄턴 양이 결국 저택에서 나가기로 결정한 날, 이제 관계를 바로잡을 기회가 사라짐에 대한 후회감을.
정말로 당신이 시중 들던 "윗층에서의 중요한 회의"에 비해 그녀와의 마지막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나요. 왜 그렇게 항상 시치미를 떼고 살아야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마지막 기회 앞에 위대한 집사로서의 실존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냥 그날은 적당히 인간적인 집사가 되어도 괜찮았잖아요.
답답한 사람아. 부친이 운명하던 그날, 당신이 잠깐 부재한다고 저택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았습니까. 이미 당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프로의식은 위대하죠. 하지만 프로라는 이름 뒤에 숨어 괴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괴물이라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길을 따라가고 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인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을 한번 고민해보았습니다. 혹시 야망 아니었을까요. "위대한 집사"와 "품위"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숭고한 단어로 포장하였지만, 결국 상승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상을 사다리로 보든 바퀴로 보든 그게 중요할까요? 당신은 위로 올라가고자 했고, 중심으로 이동하고자 했던거죠. 테일러 부부네서 처칠을 만나봤다느니, 외교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느니 얘기할 때 저는 폭소했습니다. 당신은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항변했지만, 다분히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계급 의식이 옅보이는 일화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을 과연 욕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결국 부분적으로는 조금씩 가지고 있는 모습인 것 같아서요. 당신은 그저 그런 모습들을 극대화시켜 놓은 한 인물이겠죠. 당신처럼 우리 모두 후회하는 전환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다고 또 남아 있는 나날들을 100% 확신하며 잘 살아갈 자신은 없는 연약한 영혼들이니까요. 신분 상승은 하고 싶지만, 그저 고군분투하고 있는 일개미이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한번 당신을 반면교사 삼아볼까 합니다. 위대해지는 것 이전에, 내 공간에 꽃을 들여다 놓을 줄 알고, 스스로의 허점을 인정할 줄 알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녁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 다리를 쭉 펼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나의 남아 있는 나날은 조금 더 석양으로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