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패배주의

"주제 사라마구 -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고

by 주희진

약 3년 전에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었다.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편임에도 워낙 유명한 책이라 손에 잡혔던 경우인데, 한번 읽기 시작하자 빠져나오지 못해 명절에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 사이에서도 책을 계속 놓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디스토피아의 전형 같은 느낌을 준다. 특정 계기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사회 시스템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그 시스템이 제공하던 기본권이 하나씩 사라져갈 때 인간은 천성을 드러내며 다양한 양태로 변모한다. 영리한 부류는 시스템을 재편하고 지배하며, 약삭빠른 부류는 재빠르게 조력하며 그 시스템에 편승한다. 그 시스템을 재편하는 부류는 대체로 빌런이다. 도덕에 묶인 자들은 고려할 바가 더 많아 행동에 있어 다소 느리고 불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다수는 무기력하게 지배당하고 착취당한다. 그 중에는 끊임없이 저항하는 소수도 있다.


디스토피아라는 테마가 주는 강렬한 인상은 대체로 악한 인간 본성에서 온다. 인간이 고결함을 버리고 어디까지 바닥을 보여주며 행동하는지 관찰하면서, 동시에 나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고민하게끔 만들면서 부분적으로 소설 속 인문들의 행동에 몸서리치기도 하며, 때론 부분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새 완성된 소설 속 절대악의 존재에 대해 나였더라면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어쩌면 결국엔 굴종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생각을 교차시키고 나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 전체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테마가 매력적인 것 아닐까.


펜더믹을 기점으로 하여 코로나 뉴노멀 시대가 되었다. 소설만큼 극단적 디스토피아는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시스템이 무너져가는 걸 관찰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식량을 지배하는 빌런이 있었듯, 코로나 때에도 마스크를 가지고 장난질하는 빌런이 있었다. 환경이 변화하면 그 변화를 악용하는 빌런은 항상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역시 성악설이 맞았어! 인간은 대체로 쓰레기야" 라고 외치기도 한다. 성악설. 설득력이 있다. 가끔 인간 존재에 대해 진절머리가 날 만큼 기이한 뉴스들을 볼 때 역시 성악설이 답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악한 면을 당연시하고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럴수록 인간의 선한 면을 믿고 그러한 면이 널리 퍼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디스토피아라는 테마에서 기억해야 할 존재는 "시스템을 공정하게 재편하려 했지만 선점에 실패한 사람들"과 "재편된 시스템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사회가 그 동안 얼마나 진화해왔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이 빌런에게 굴종하기만 했으면 이러한 사회적 진화는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빌런을 소거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유토피아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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