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친구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
[침묵의 늪 연재 종료 안내]
안녕하세요, 고요작가입니다. 오늘 부로 연재를 종료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매주 월요일에는 ‘침묵의 늪’, 화요일에는 ‘디자인의 자격’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글을 나눠 연재해왔습니다. 그런데 저와 맞지 않은 방식이란걸 깨닫고 최대한 글을 오래 쓸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가 쓰기 편한 글을 쓰자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고, 더 정리된 형태로 돌아오려 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요 드림
나는 유치원생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하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바깥에서 뛰어놀 때면, 나는 조용히 구석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다. 내 안에 떠오르는 장면과 상상을 종이 위에 펼치는 일이 그렇게도 즐거웠다. 하루 종일 그림에 빠져 사는 날도 있었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보겠다며 끄적이는 시간은 내게 작은 모험 같았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웹툰에 관심이 생겼고, 어느새 내 꿈은 ‘웹툰 작가’가 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내 삶은 금세 생기로 가득 찼다. 나는 공책 위에 마인드맵을 그리고,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구상하고, 갈등 구조를 상상하고, 장면의 구도를 고민하는 걸 참 좋아했다. 그건 내게 가장 진심이 담긴 놀이였다.
하지만 그 열정과 기쁨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와 같은 반에 그림을 좋아하는 절친이 있었다. 그 친구는 늘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선 하나, 색감 하나에서도 깊이가 느껴졌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림을 표현해 냈다. 나는 그 친구를 정말 좋아했고, 함께 그림 그리고, 이야기 나누고, 꿈을 말하던 시간이 따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 친구를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의 재능이 반짝일수록, 나는 점점 위축되었다. 똑같이 그림을 좋아했지만, 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점점 괴로워졌다. 그 친구는 그저 자기가 잘하는 걸 즐기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림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림은 나의 유일한 원동력이었으니까.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 나는 그림을 그릴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그게 내 현실이다.
언제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을까.
나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를 따라 낯선 지역으로 이사 간 이후의 일이었다. 반 아이들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더니, 옷을 어디서 샀냐고 묻기 시작했다. 말투는 어딘가 취조처럼 따지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런 분위기를 잘 읽지 못했다. 그냥 솔직하게, 어머니가 사주신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해맑음이 오히려 더 이상했을 수도 있겠다.
며칠 뒤, 할머니가 그리워져 고향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때 절친을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장소에 나온 그 친구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엔 같이 장난치고 웃던 사이였는데, 그날은 다른 친구를 데려왔고, 우리 셋이 친하게 지냈던 또 다른 친구를 욕하기 시작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 아이를 따라 옷가게에 갔는데, 친구는 중학생이 되기 전에 입을 최신 유행 옷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있었지만,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고, 결국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게 됐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고, 나는 가족들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릴 적 초등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남자아이가 나를 찾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예전의 절친은 나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왠지 서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남자아이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적어도 누군가는 나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 깊은 곳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친구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감정은 오랫동안 나도 인정하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
뒤처지고 싶지 않은 두려움,
그리고 그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온 것이란 걸. 그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닮고 싶어 했던 거다. 지금에서야, 친구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한다.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었어.
너는 내게 최고의 경쟁자이자, 내 인생 다신 없을 친구였어.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