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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ㅁㅁㅁ Oct 15. 2022

왓츠 인 마이 보따리

영어 수업은 많고 많은 수업 중 하나다. 아이들은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체육, 도덕 등의 학교 과목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방과후수업, 개인 과외, 공부방, 피아노학원, 태권도, 눈높이, 구몬, 영어학원, 수학학원, 대치동 학원, 화상 수업 등의 일정을 소화하기 바쁘다. 그중 4학년 영어 교과는 일주일에 2번, 일 년에 약 77시간을 차지한다.


28명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 영어 수업. 여기에는 알파벳을 모르는 아이와 영어 유치원을 다녔던 아이가 공존한다. 캐나다에서 살다 온 L은 한국말이 서툴고, 학원을 다닌 적 없는 K는 대놓고 영어를 싫어한다. 그 어디엔가 속하는 아이들이 한 곳에 앉아있다. 그들은 여기 앉아있고 싶어서 앉아있는 게 아니다. 다들 앉아있으니까 별수 없이 함께 있는 아이들. 이왕 함께하는 거 즐거운 게 장땡이다.


아이들은 분위기에 약하다. 너도나도 분위기에 휩쓸린다. 제아무리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하거나 영어 울렁증이 있다 해도 분위기가 즐거우면 덜 지루하고 덜 괴롭다. 재밌는, 편안한, 유쾌한, 흥미로운, 신나는, 잘하는 듯한, 할 수 있는, 집중하는, 좋은 분위기와 좋은 에너지! 누가 영어를 못하고 잘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신경 쓸 겨를 없이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정신을 홀리는 수업을 지향한다.


나의 정체성은 보따리장수에 가깝다. 40분 동안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콘텐츠들을 쏟아낸다. 좋은 것만 드리는 켈로그의 심정으로, 총 내용량 2400초에 교과서 12.5%, 단순 반복 연습 12%, 시청각 혼합제제[노래, 영화, 그림] 20%, 정제 퀴즈 22.5%, 단체 게임 35% 등의 엄선된 재료를 담아서 유탕처리 없이 가공한다. 


순서는 주로 교과서, 간단한 표현 연습, 퀴즈, 그리고 게임이다. 교과서는 5분이면 끝나지만, 잠깐의 교과서 사용은 성취감과 해방감을 불러일으키는 필수 코스다. 쉬운 내용을 후루룩 들이키고 ‘자 이제 교과서 끝’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교과서를 폈다가 5분을 하고 덮는 것과 애초에 펴지 않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자 오늘 몇 쪽’이라는 말은 수업의 문을 열어주고, 날마다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는 심리적 안정감을 선사한다. 

 

이어지는 표현 복습. 배보다 배꼽이 큰 리액션으로 힘을 싣는다. 연신 “Great”, “Very good”, “Excellent”, “wow”, “Exactly”, “Perfect”, “nice”를 외치다 보면 어느 정도 그렇게 된다. good이라고 하는데, 굳이 good이 아니라고 트집 잡는 사람 없다. 당신은 good이에요 good good good!

  

다음은 흐트러진 집중력을 한데 모을 차례! 남녀노소 퀴즈를 좋아한다. 실력과 운의 이상적인 비율은 6:4 정도다. 적당히 추리도 하고 찍어가면서 맞히면 더 큰 희열을 느낀다. 무언가 숨겨져 있고, 본 듯 만듯하고, 알 것 같은데 백 프로 확신할 수 없어서 시시하지 않은 퀴즈. 잘하는 친구도 틀릴 수 있고, 누구든 운 좋게 맞힐 수 있어서 부담 없이 손을 들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건 지목이다. 반응속도와 참여율, 정답률을 고려해서 골고루 기회를 주어야 원성을 사지 않는다. 평소 소극적이었던 아이들에게 특히, 맞힐 수 있다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서, 기를 살린다.  


마지막은 역시 게임! 이번 게임은 코코넛 셔플이다. 그 옛날 브레인 서바이벌 떡 먹은 용만이를 찾는 게임. 한마디로 야바위 게임으로 단어와 문장 쓰기 연습을 할 수 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코코넛이 움직이면, 진주가 들어있는 코코넛을 찾아서 해당 표현을 쓰는 식이다. 난이도와 점수를 조절해서 승부욕에 불붙이기 좋은데, 숨죽이고 집중하는 만큼 득점에 열광하거나 희비가 엇갈린다. 시계를 보는 아이는 없다. 시간을 의식한다는 건 지루하다는 뜻이고, 그럴 때 딴소리와 다툼, 비난도 많아진다. 차라리 과몰입의 부작용, 과열된 에너지를 받아내는 게 낫다. 모두가 코코넛에 일심동체로 일희일비하며 몰입한다. 게임에 몰입하지 않는 사람은 교사뿐. 다음 문제 난이도는 어떤지, 누가 열심히 하는지, 분위기가 어떤지, 몇 분이 남았는지 살피느라 마음이 바쁘다. 


게임 결과나 점수는 어물쩍 넘어간다. 종이 쳐서 부랴부랴 마칠 때도 있고, 너도나도 총점을 외치면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아이더러 반 전체에 작은 간식을 나눠주게 하거나, 합산한 점수를 적어서 로또 번호 추첨하듯 행운의 주인공을 뽑을 때도 있다. 그때그때 분위기와 시간에 따라 다르다. 아이들도 별생각이 없다. 어쩌면 게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이 쳐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쉬는 시간만큼 큰 보상이 있을까.


오늘도 보따리를 탈탈 비워 시간을 채웠다. 주섬주섬 다시 챙겨서 옆 반에 간다. 나머지 네 반 수업이 끝나면, 너덜너덜해진 보자기에 내일의 활동들을 새로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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