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즈(Fez)로 돌아가는 택시 안, 우리는 시속 100km로 달리고 있다. 차창 너머 황량한 풍경은 머릿속을 비워낸다.…”
평생교육원 수필 수업에서 처음으로 낭독했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뛰던지 목소리와 글이 따로 놀았다. 두 문단 정도 지나서야 떨림이 가라앉고 화면의 글자 너머 이야기에 집중이 됐다. ‘그래, 내 얘기잖아. 그렇게 고쳐댔으면 외워서도 읽겠다.’ 그랬다. 살면서 처음 완성한 애증의 수필! 몇 날 며칠 노트북 앞에서 문장을 조각조각 뗐다 붙였다 자르고 기워낸, 너덜너덜해진 글. 남들에게 차마 못 보이겠다며 몇 주째 미루다가 더 이상은 글에게도 나에게도 못 할 짓 같아, 포기하듯 제출한 글이었다.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경험은 확실히 새로웠다. 문장에 집착했지만, 결국 읽으며 몰입된 순간은 그 속에 담긴 내 진심을 마주했을 때였다. 그때 느꼈다. 글을 쓴다는 건 글자에다 목소리, 그러니까 마음의 소리를 입히는 일이구나. 글마다 고유의 주파수가 담겨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겠구나.
다 읽고 나서 한 분씩 돌아가며 특정 문장을 칭찬하기도, 질문하기도 하며 감상평을 말해주셨다. “와.. 하면서 들었어요. 생각이 굉장히 깊네요. 잘 읽었어요.” 따뜻한 분들은 처음 발표하는 풋내기 수강생의 기를 살려주셨다.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쏟아붓는 칭찬을 생각하면 주로 그건 사랑 표현이라서 과분한 피드백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행복했다.
이실직고하면 수업 첫날, 시작하기 직전의 마음은 이와 정반대였다. 3월 8일, 강의 10분 전, 비디오를 끈 채 줌 회의실에 입장했을 때, 생각지 못한 분위기에 헉 했다. 교수님으로 보이는 분과 어르신들이 자연스럽게 근황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잘 지내셨어요, 몸은 어떠세요’와 같은 안부를 주고받는데, 오래 알고 지낸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화면을 뚫고 전해진 것이다.
내 존재가 너무 뜬금없게 느껴질 것 같아서 황급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바로 평생교육원에 전화를 걸었다. 환불받으려고 하는데요,라고 말을 뗐는데 말한다고 오케이 되는 게 아니었다. 절차가 상당했다. 수업 시작 전까지 양식에 맞게 메일을 보내라니. 부랴부랴 홈페이지에 가서 양식을 내려받고 항목을 채우려는데 이런. 시간이 1분도 안 남은 것이다. 도대체 수강료 납입 일자를 어느 세월에 조회하고 계좌번호, 휴대폰 번호 등등 입력할 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냥 들어가자!
재입장해서 화면을 켰다. 학교 동학년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웃어. 사람 대 사람으로 어려워하지 말자. 화면에 여덟 분의 낯선 얼굴이 보였다. 교수님은 ‘새로운 분이 왔으니 자기소개를 할까요’라고 운을 띄웠다. 사실상 나만 새로웠으니, 날 위한 소개였다.
초반 20분가량의 자기소개 시간이 이 모임의 분위기를 다 말해준 듯하다. 나보다 두 배 이상 연세가 많은 분들이 한참 어린 외부인을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진심을 담아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돌아가며 자기소개해 주신 게 좀 감동이었다. 딱딱하고 형식적인 인사말이 아니었다.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로 긴장을 풀어주는 말솜씨. 이것이 어른의 배려구나. 그들의 환대는 모든 것을 녹였다. 나 여기에 와도 괜찮은 건가, 정말로 함께할 수 있는 걸까,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렇게 되고 싶어지는 말랑말랑한 기분.
“하던 일을 줄이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신청했습니다. 글쓰기가 어렵고 낯설어서 긴장되는데요, 많이 배우면서 즐겁게 참여하겠습니다.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대강 이런 식으로 소개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봄, 여름, 가을 계절이 바뀌고 만남을 거듭하면서, 첫인상 그대로 정말로 좋은 분들이란 걸 느꼈고, 자신을 드러내며 소통할 수 있는 수필의 매력을 찐하게 느꼈다. 수업은 대체로 직접 낭독하고 합평하는 식으로 진행됐고, 신뢰가 쌓이면서 다른 데 가서 말할 수 없는 것도 꽤나 적나라하게 오픈할 수 있었다. 삶을 진심으로 대하는 멋진 어른과 글로 소통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평생교육원 강의실에서 함께하는 분들은 삶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할머니이자 은퇴한 교수님, 남편 혹은 할아버지, 어머니이고 아버지였지만, 글에서는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는 재야의 고수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수필 계에서 자리 잡고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하는 등단 수필가였다. 처음에 그분들의 글을 읽고 많이 놀랐다. 줌에 처음 입장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아름다운 글이었다. 먼저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감탄했고, 재치와 지혜가 넘나드는 사유, 인생의 굴곡을 지나치며 깊어졌을 따뜻한 시선이 감탄 이상의 감동을 불렀다. 동시에 나이를 초월한 생기와 열정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의 유쾌함, 열정, 따뜻함, 진심, 재치에 동화되어, 나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끙끙대며 첫 번째 글을 완성했고, 따뜻한 칭찬 세례에 취해서 다음 글을, 또 다음 글을 하나씩 써 내려가다가 다섯 달이 흘렀다. 지금 노트북 폴더에는 어쩌고저쩌고(과정), 어쩌고저쩌고(완성1), 어쩌고저쩌고(완성22) 식의 파일이 수없이 쌓여있다.
우연히 친구가 보내준 링크로, 시간대가 좋아 신청하고서 높은 연령대에 놀라 환불을 시도했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들어온 수업. 그 수업이 글쓰기 여정의 출발점이다. 뭐든 뜻밖에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