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감고 말릴 때마다, 청소기를 밀 때마다,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다 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하루는 침대에 누워서 삭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일생일대의 체험을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다. 위이잉 바리깡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민머리가 드러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 생전 처음 마주하는 나의 두피가 썩 마음에 든다. 자꾸만 만지고 싶다. 기념으로 오일을 발라보고, 목부터 두피까지 골고루 마사지를 해준다. 머리야 그동안 답답했지?
유튜브 속 민머리 동지 요가소년과 마주 보며 요가를 한다. 거치적거리는 머리카락이 없어서 그런지, 요가에 더 집중이 잘 된다. 샤워는 3분도 안 걸린다. 말릴 머리도 없이 이어폰을 꽂고 집을 나온다. 마침 혁오 노래가 들리고 나는 오혁이라도 된 듯 와리가리를 흥얼거린다. 이번 기회에 패션에 눈을 뜨고 일렉 기타를 배워볼까.
가족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친구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하해준다. 나는 평소처럼 도서관과 요가원에 다니며 일상을 살고, 왠지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한다. 낮에는 햇빛이 따가워서 모자가 필수다. 원래도 모자가 많았지만, 이제는 종류별로, 색깔별로 모으고 있다.
학교가 걱정이다.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상, 모자를 쓰면 교사 복무나 품위 유지에 걸릴까. 가발을 몇 개 주문해본다. 단발머리와 생전 안 해본 탈색 파마머리를 넘나 든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여름에 땀이 차서 불편한 건 있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 가서 물티슈로 닦아낸다.
하루는 미술 시간에 부채를 만드는데, 아이들이 난데없이 부채질을 해주는 게 아닌가. 초강력 바람에 가발이 들썩. 낭패다. 황급히 머리를 매만졌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들은 대나무 숲에 우리 선생님 머리는 대머리~라고 외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발을 벗고 출근한다. 처음에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금세 익숙해져 별 감흥이 없는데 괜한 소문이 퍼진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온다. 선생님,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요? 무슨 일 있으세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무슨 단체에 속하셨어요? 투쟁하시나요? 아이가 따라 할까 봐 걱정이에요.
아직 여자의 삭발은 낯선 모양이다. 방송에서 인기 아이돌이나 유튜버가 삭발을 하면 좀 달라질까. 인터넷에 삭발병 자극 사진 모음이 올라오거나 삭발 챌린지가 유행하는 일은 영영 없을까.
관두자! 민머리에게 학교 사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살던 곳을 떠나기로 한다. 저 멀리 바닷가 마을이 좋겠다. 연고도 없이 맨땅에 헤딩으로 시골에 정착하긴 어렵다. 청년 대상 귀촌 체험 프로젝트로 시작한다. 마을 인프라와 분위기를 살피며 이웃들과 친분을 쌓고 괜찮은 동네에 터전을 잡는다. 마당이 있는 주택을 구해서, 꿈꿔왔던 공간으로 리모델링한다. 이곳은 책방과 카페와 숙소가 함께 있는 북스테이가 된다.
그간 몰라보게 머리가 자라 있다. 다시 위잉위잉 바리깡을 들고, 머리카락 한 올도 남김없이, 지난날에 대한 미련도 함께 밀어버리며, 제2의 인생 준비에 힘쓴다. 삭발은 어쩌면 나의 오래된 꿈을 위한 발걸음이었을지도.
나는 한적한 바닷가에 작은 독립서점과 창작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동네 사람들과 책을 읽고 아이들과 글쓰기 모임을 하며, 가끔 독립출판 작가를 초청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아침에는 커피와 요가로 몸을 깨우고 텃밭에서 과일과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산책을 하다가 이웃을 만나면 직접 만든 사과잼 파이를 나눠 먹거나 책을 선물한다. 마을 사람들은 계절별로 시집을 내고 있다. 나는 아마 모든 순간을 사랑하며, 느리게 느리게 살아간다. 어른과 아이와 개와 고양이와 오리와 참새와 거북이가 사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즐겁다.
눈을 뜨고 시뮬레이션이 끝났다. 나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하고, 아마도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왜인지 기분이 산뜻하다. 이 현실을 충실히 살아갈,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