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윈디로 가자.
교토의 대표적인 사찰, 기요미즈데라로 향하는 길에 커피 한 잔이 몹시도 고팠다. 구글 선생님에게 여쭈니 가까운 곳에 훌륭한 카페를 알려주셨다.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다. 윈디(Windy)라는 이름은 부르기도 쉽고 친숙했다. 대로변에서 골목으로 살짝 들어가야 나오는 카페였는데 외관도 아담한 데다가 'windy'라고 쓰인 글씨체가 귀여워서 얼른 카페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굳게 닫힌 문이 마음에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가보니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 첫 번째 방문은 퇴짜를 맞은 셈. 교토에는 *커피 문화가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은 탓에 훌륭한 카페들이 많았다. 굳이 윈디를 다시 찾을 필요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나를 이리도 매몰차게 거절한 이유뿐만 아니라 구글 선생이 그토록 칭찬한 이유까지 더해지자 다시 방문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태어났다.
첫 방문은 다른 데로 향하는 길에 걸쳐져 있었다면 두 번째 방문은 오로지 윈디로 향해 있었다. 간단히 사전 조사도 해두었다. 40년 전통의 교토 커피 장인이 직접 내려주는 융드립 전문 카페이며 현금 계산만 가능하다는 점, 휴대폰과 태블릿, 노트북 사용이 금지된다는 점이 특이사항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고상하게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커피 한 모금을 우아하게 들이킨 다음, 우수의 젖은 눈으로 책을 읽어 내려간다면 나의 고상하고 지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전해질 거라 믿으며.
다시 골목 안쪽에 자리한 윈디 앞에 섰다. 굳게 닫혀 있어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했던 문은 어쩐 일인지 활짝 열려있었다. '어서 와, 너무 반갑다. 왜 이제 왔어?'라고 말을 건네는 듯해서 '와 태세전환 장난 아니네?' 싶었다가 이내 옹졸해졌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풀어헤쳐지고 말았다. 활짝 웃고 있는 문 앞에 다가서니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카페는 2층이었다. 계단을 올라 카페 정문 앞에 섰다. 오랜 세월이 깃든 나무로 된 문을 마주했는데 심장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더 두근거렸다. 이 문을 열면 어떤 세계를 마주하게 될까? 궁금했다, 진심으로.
이윽고 오래된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섰다. 어느 것 하나 오래되지 않은 것들이 없어서 과거로 돌아간듯했다.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이야기한다는 건 낡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오랜 세월 동안 단단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자부심이었고, 시간이 켜켜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은은하고 고고한 아름다움이었다.
카페의 운영은 사장님 내외 두 분이 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으니 사모님이 따뜻한 물수건과 시원한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환대였다. 물수건엔 따뜻한 마음이, 시원한 물속엔 사려 깊은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9월 하순임에도 아직 한여름 같았던 교토를 지나는 여행자에게 건네는 환영인사가 싱그러웠다.
No.1 블렌드라고 쓰인 커피 한 잔을 시켰다. 40년을 커피콩을 볶아 융드립 커피를 내려오신 커피 장인이 넘버원이라 말하는데 나 같은 커피 애송이가 다른 메뉴를 도전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종이필터로 내리는 드립 커피가 일반화된 지금 시대에 융드립 커피라니, 그것도 40년의 내공을 지닌 커피라니 기대가 컸다. 어떤 기술을 뽐내실지 어떤 맛이 날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어떤 마음으로 커피를 내릴지 궁금했다.
마침내 커피가 나왔다. 아름다웠다. 짙고 짙은 갈색이 더해지고 더해져 짙은 밤의 색을 닮아 있었다. 짙은 밤이 담긴 잔은 새하얗고 적당히 화려한 문양을 지니고 있어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절묘하게 조화로웠다. 커피 잔 가까이 코 끝을 갖다 대보았다. 묵직하면서도 중후한 향이 전해졌다. 드디어 맛을 볼 차례, 조심스레 입가로 커피 잔을 옮겼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짙은 밤이 한 모금 스며들었다. 진한 풍미가 느껴졌다. 단지 한 모금이었을 뿐인데 여러 잔의 커피를 응축한 듯 깊은 맛이 느껴졌다. 뭐지, 내가 딴 데 보고 있을 때 약이라도 탔나? 살짝 의심했다. 깊음이 있었다. 커피를 음미하면서 드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음미하고 싶어지는 맛이랄까? 다크로스팅에 대한 거부감이 한창 있었던 터였다. 쓴맛과 탄맛으로 요약되는 다크로스팅 커피, 그런 커피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는데 아니었다. 자칫 깊은 맛이 무거워질라치면 단맛이 배어 나와 균형을 잡아주었다. 정성 들인 한약을 먹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야심 찬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다. 한국인의 고상함을 뽐내고 싶었다. 한글로 된 책을 꺼내 읽으려 했다. 일본인의 입장에선 외국어로 된 책을 읽고 있으니 더 멋지게 보일 것 같았다. 책을 꺼내어 첫 장을 펼치며 슬쩍 사장님 내외의 반응을 살폈다. 잰걸음으로 다가오시더니만 책을 읽지 말라는 눈치를 주셨다. '왜요 뭐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들은 한국어를 몰랐고 나는 일본어를 몰랐으며 '와이, 왓?'을 외쳤어도 퇴짜를 맞을게 분명했다. 살짝 마음이 상하려는 찰나, 사장님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공간은 오로지 커피에만 집중하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다. 디저트를 팔지 않는 이유도 오로지 커피, 커피를 온전히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하셨다. 와.. 이토록 커피에 진심이라니 마음에 싱그러운 바람이 이는 듯했다.
커피에만 집중하라는 말은 다시 말해 커피와 사람을 소중히 하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비록 홀로 방문했지만 그곳엔 맛나는 커피와 사장님 내외분이 있었다. 커피에 진심이듯 사람과의 관계에도 진심인 두 분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사장님도 사모님도 그리고 나도 영어를 못하는 건 마찬가지여서 현대문명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ㅍㅍㄱ 앱을 열어 소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궁금했던 건 카페 이름이었다. 윈디라는 멋진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는지 물었다. 그건 바로 사장님이 좋아하는 팝송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 했다. 낭만이었다. 사장님의 젊은 시절 음악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 곡을 유튭선생님을 통해 찾아들었다. 이내 그 노래에 빠져 들었다. 흥겨운 멜로디에 밴드 멤버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화음을 넣고 있었는데 어찌나 조화로운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사장님이었다 해도 윈디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카페 이름을 지을 수 없었으리라.
어느덧 떠날 시간이 되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부는 카페 윈디를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음을 조금 두고 왔다. 그제야 무겁던 발걸음이 조금씩 떼어지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두고 온 마음을 찾으러 다시 윈디로 향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윈디 밖으로 나섰을 때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커피와 사람에게만 마음을 두었더니 바람처럼 자유로웠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싶다면 윈디에 가자.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싱그러운 바람이 되는 곳, 윈디로 가자.
*교토는 일본 내 커피 소비 1위 도시
카페 윈디(Windy)의 위치
https://maps.app.goo.gl/k7NufC5RNmGSnjN69
사장님이 좋아하는 노래, The Association의 'Windy'
https://youtu.be/RsY8l0Jg3lY?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