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세 번째 지난주
인격(人格)의 사전적 정의 중 가장 으뜸 하는 뜻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다. ¹ 언어 사용자들에게 익숙한 용례상 ‘인격’이 주로 ‘대우(待遇)’나 ‘모독(冒瀆)’과 호응하는 탓에 인간을 외부에서 규정하는 어휘로만 인식되기 쉬우나, 분명 정의상 우선하는 의미는 ‘한 인간 그 자체의 품격’에 관함임을 알 수 있다. 곧 ‘인격’이 존중 혹은 폄훼당한다는 말은 ‘인격’이 ‘관계’ 속에 놓였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인격’의 활용은 대상 그 자체에만 주목하는 ‘사람으로서의 품격’에 비해 간발의 차이로 뒤에 놓임이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오늘은 그간 본의 아니게 소외된 ‘인격’의 본연에 주목하고자 한다. 마침 지난주에는 매우 빼어난 성적, 아니 완전히 격을 달리하는 인격, 곧 품격이 다른 족적을 새긴 한 프로야구 선수가 선수로서의 여정을 마감한 바 있다.
바로 이승엽 선수에 관함이다. 그가 남긴 엄청난 기록에 관하여는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 대단하고도 엄청난 것이었다. 한데 많은 이들이 그의 성취가 그의 피나는 노력에 기인한 것이라 말한다. 틀림없이 옳은 진단이다. 하지만 누구든 그만치 노력한다고 하여, 그만큼의 성과를 낼 수는 없을 터이다. 필경 타고난 재능 자체도 달랐을 것이고, 운도 따랐지 않겠나…. 당연한 말이 늘어지고 있음에 양해를 구한다. 다만 힘주어 주지하고픈 바가 있다. 그가 이 모든 긍정적인 동인(動因)을 오롯하게 담아내고 또 실현해낸, 특유의 고유한 인격을 그 바탕에 두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 차이는 사람마다 그다지 크지 않으나, 무척이나 쫓기 힘든 것이다.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름에 의한 거룩함을 내재하고 있다는 ‘직업소명설’ ²에 기대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개인이 아닌 전체라는 틀 속에서 자라나며, 자신에게 적합한 일자리 찾기에 번번이 실패해온 우리에게는 거창한 담론일 뿐이다. 이 안타까운 현실의 최대 비극은 ‘업(業)과 마주하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한없이 지연된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안타깝게도 오늘은 ‘업과 마주하는 나’를 온전히 발견하고, 능히 이를 바르게 세워 격을 달리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가끔 좀 먼 곳을 바라보는 일도, 괜찮기는 하다.
저는 상품이거든요.
상품 가치가 떨어졌을 때, 제가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분명히 올해 은퇴를 해도 아쉽고
나중에 성적이 더 떨어져서
몇 년 있다가 은퇴를 하면
“왜 그때 은퇴를 안 했을까?” 하는 후회도 들 것이고...
- SBS 스포츠 특집 다큐멘터리, <L36END 이승엽> 중 이승엽 선수 발언 ³
이승엽 선수가 언제부터 위와 같이 인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프로야구라는 특수한 직업적 성격에 기반을 둔 자신의 상품성을 인식한 탁월함에 주목한다. 사람을 상품에 비유함은 듣기에 따라 다소 껄끄러울 수 있으나, 기실 모든 것에 가치가 매겨진 세상에서 유독 자신에게만 관대할 수는 없는 일이겠다. 그리하여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는 차원이 아닌, 내가 나를 나의 업무와 견주어 어떤 이가 되어야겠다는 인식은 대체로 중요하다. 감히 이 인식이 이승엽 선수의 그토록 피나는 노력에의 근간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종국에는 전혀 격을 달리하는 선수가 된 바탕이었다고 진단한다. ‘나’라는 상품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노력하여 좋은 성적을 내는 일이 가장 올곧은 지름길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모든 이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를 평가받는다. 하나는 외모이고 다른 하나는 인성이다. 이 횡행한 세 치 혀에의 언짢음은 잠시 젖혀둔 채, 이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피고자 한다. 외모에 관하여는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대충 짐작이 되나, 이 인성이라고 하는 것에는 뚜렷한 기준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어떤 부정적인 일을 하지 않았거나 관련이 없을 때 보편적으로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기부나 봉사활동 등 명백한 선행이 이루어지면 더 높게 평가받고는 한다. 이승엽 선수에 한정하자면, 그는 빼어난 실력 이외에도 바로 이 ‘인성’이 좋은 선수라는 평가를 줄곧 듣고는 하였다. 하지만 이는 단지 ‘사람이 좋은’이라는 격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라 다쓰노리 요리우리 감독은 한국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이승엽이야말로 최고의 타자이며. 기술적으로 손 볼 때는 전혀 없다”고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이를 전해 들은 이승엽은
“아니다. 내게 단점이 있기 때문에 타석에서 10번 중 7번은 안타를 못 치는 것이고. 삼진이 100개(지난해 126개)를 넘는 것이다. 배울 점은 아직 많다”고 정색을 하며 말을 했다.
이승엽은 이번 캠프에서 우치타 준조 타격코치와 함께 몸쪽 높은 공 공략에 대해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있다.
- 일본 프로야구 활약 당시 인터뷰 내용 ⁴
표면적으로 이승엽이라는 선수가 ‘인성이 빼어난’ 선수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가 여전히 스스로 부족하다고 믿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항상 더 새롭게 배울 것이 있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앞에 ‘거만’이나 ‘오만’이 설 자리는 없었을 게다. 그런데 다른 선수는 그보다도 성적이 한참이나 좋지 않다. 그 답답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그가, 또한 스스로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가 홈런을 쳤다고 과격한 세리머니를 하는 일도 익숙지 않았을 터이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⁵, 즉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임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겸손하게 갖는 일을 정의 그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차원은 우리가 배울 대상으로 삼기에도 너무 격이 다른 차원이라, 나는 그저 이런 선수의 플레이를 동시대에 바라볼 수 있었다는 기쁨에 만족하기로 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았다거나, 하심을 지녔다든가 하는 지경은 그럴듯한 언어로 정의할 수 있는 영역에 있었다. 하지만, 울산 문수야구장 개장 1호 홈런, (삼성 소속) 라이온즈파크 첫 홈런, WBC 초대 홈런왕,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터진 무수한 홈런들을 모두 실력, 노력, 근성과 같은 단어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저 환상적이다. 어느덧 그는 타석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무슨 일을 일으키고야 말 것만 같은 환상의 선수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는 곧 이승엽이라는 이름이 한 명의 선수에 머무를 수 없는 비중을 지니게 했다. 소속 프로팀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일본 프로야구 무대나 국가대표로서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이미 올라서 있었다. 곧 엄청난 중압감이 그를 짓눌렀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 이후의 인터뷰에서 흘린 눈물은 그의 중압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이와 같은 중압감은 형은 아우의 몫까지 해내야 하고, 국가라는 굳건한 전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오래된 사명으로부터 비롯한 것임은 틀림없다. 우리가 오래된 가치보다는 새롭고도 세련된 공동체의 성격을 연마해나가야 한다는 문제와는 별개의 차원으로, 오늘은 이승엽이라는 선수가 맞이했을 중압감의 무게에 집중해본다. 그는 이마저도 결정적인 한 방으로 물리치고는 했다. 반복되어버리지만, 이 격의 다름은 도무지 설명할 왕도가 없다. 환상의 선수가 만화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음에도, 또 이를 능히 해내며 더욱더 환상적인 행보를 걸어나감을 그저 황홀하니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을 멍하니 바라본 이후에라도 다시금 상기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 결과의 이름이 환상이건 그 무엇이건 그가 엄청난 중압감과 싸워나갔던 시간이 있었음이다. 그런 것은 연봉이나 여타의 부가 소득 따위로 보상받을 수 없다. 그저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감사를 전할 수밖에는 없는데, 나에게는 이 졸고가 그러하다. 부족함을 알기에, 언제까지나 응원하겠다.
그는 자신이 속한 영역과 그 속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의미를 모두 이해한 선수였다. 그리하여 야구 자체이건 외적인 부분이건, 미진하거나 불미스러운 행보를 걷는 일이 집단 전체의 품격을 훼손할 수 있음도 함께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제 입에 풀칠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함께 고민의 영역에 집어넣기란 차라리 사치에 가까울지 모른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무대에서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음으로써, 이 땅의 야구가 그 실력과는 무관하게 품격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 이승엽이라는 선수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그의 앞날에도 미약하나마 박수를 보탠다.
설령 앞으로 그와 같은 선수를 다시 볼 수 없을지라도, 품위를 지닌 채 품격의 야구를 할 줄 아는 후배 선수들이 등장할 적마다 이승엽이라는 앞서 걸어간 사람을 상정했으리라 여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은퇴하였으나, 그라운드에 오래도록 함께할 것이다.
참고
¹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인격 (人格)> 항목
- 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w.jsp
²
- 위키백과, <직업소명설> 항목
- https://ko.wikipedia.org/wiki/%EC%A7%81%EC%97%85%EC%86%8C%EB%AA%85%EC%84%A4
³
- SBS 스포츠 특집 다큐멘터리, 2017년 10월 3일 방영, <L36END 이승엽> 중
⁴
- 중앙일보, 일간스포츠, 정회훈 기자, 2007년 2월 7일 자, “[이승엽 홈런왕을 향해] 겸손과 욕심의 적절한 조화”
- http://news.joins.com/article/2628935
⁵
- 네이버 원불교대사전, <하심(下心)> 항목 중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14423&cid=50765&categoryId=50778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2017년 10월 3일 자, “이승엽, 전설이 되어 그라운드를 떠나다”
- http://www.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71003211200013&from=search
*
- SBS 스포츠 골프 뉴스, 2017년 9월 28일 자, “이승엽의 마지막 야구 이야기, 특집 다큐로 방송”
- http://sbssports.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S10008775423
**
- Insight, 김지현 기자, 2017년 8월 4일 자, “'전설' 이승엽이 홈런을 치고도 세레모니를 하지 않은 이유”
- http://www.insight.co.kr/news/11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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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블로그, “천사화랑”의 블로그 글 중, 2008년 8월 22일 자, “이승엽 눈물 속사연 “죽고 싶을 정도로 미안했었다” 글썽 [동영상]”
- http://blog.daum.net/zenka224/1348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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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2017년 10월 3일 자, “마지막으로 타석 서보는 이승엽”
- http://www.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71003212300013&from=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