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Nov 05. 2017

미국식 농담 _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리뷰

여든일곱 번째 지난주




농담을 걸어오는 영화


 연애사(戀愛史)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단연 “웃음 포인트”라 확신한다. 인간의 생김이 각자 다르듯 마음 또한 온전히 사맛디 아니할세, 제아무리 죽고 못 사는 연인일지언정 성정(性情)의 상이함으로 관계가 상하는 경우야 도처에 널려있음이다. 방금도 보았다. 그런데 그 안타까운 틀어짐은 낮지 않은 비율로 ‘웃음’을 공유하지 못하는 지경에서 촉발한다. 나는 진지하고자 하는데 이 연인이라는 자는 웃어넘기려 한다든가, 나는 이만치 웃길 수가 없는데 그대는 처연하면 그토록 난감할 데가 없다. 이는 절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의 다름이다! 각자의 고유한 경험으로 새겨진 인식의 틀이, 감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타인을 주조하는 탓이다. 문제는 이 다름이 쉽게 닮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웃음 포인트”의 다름이 원인이라 여겨지는 연애상담마다, 필자는 단호하게 이별을 종용하고는 하였다. 단지 배가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일상적인 관계야 문제 될 것은 없다. 그 사람이 안 좋아하는 농담은 자제하고, 나는 별 관심이 없으나 상대가 진지하게 걸어오는 이야기에는 귀만 쫑긋 세워주면 된다. 하지만 연애는 그럴 수 없다. 연애라는 관계에서 주고받는 농담과 웃음은 곧 관계 그 자체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영화가 농담을 걸어온다면 어떨까? 연애에서처럼 재밌거나 웃기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재미는커녕 심각해진다면, 문제가 된다. 지난주, 문제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기이한 한 편의 영화가 찾아왔다. 들은 농담을 전해본다. 




 - 여든일곱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 2017)>을 다루었습니다.

 - 본 리뷰는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직 개봉 전인 작품을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줄거리 ¹

뉴욕에 사는 토마스
작가가 되고 싶지만 기회는 오지 않고
짝사랑하는 미미와는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다
매일매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아버지와 낯선 여자 그리고
수상하게 친근한 이웃 제랄드까지
토마스에게도 누구보다 특별한 날들이 시작되는데...

SUMMER가 떠나고 아주 로맨틱한 AUTUMN이 왔다!









SUMMER도 없이 AUTUMN도 없이


SUMMER가 떠나고 아주 로맨틱한 AUTUMN이 왔다!

-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홍보 문구 중 ¹


 성공한 전작(前作)의 기억은 감독인 마크 웹 보다 한국의 배급사에 더 깊게 아로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현실 로맨스의 레전드로까지 호명되며 국내 영화팬들로부터 큰 호응을 끌어냈던 <500일의 썸머>를 연출한 감독의 영화가 돌아왔으니 그럴 법도 하겠다. ‘돌아왔다’라고 표현함은 그의 다소 일관성이 결여된 듯한 필모그래피와 무관하지 않다. <500일의 썸머> 이후 마크 웹 감독은 “어메이징”한(?) 작품들(<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어메이징 메리>)을 돌고 돈 이후에 자신의 주특기인 “연애의 이해”로 복귀(?)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짧지만 독특한 필모그래피를 보유하게 된 마크 웹 감독의 귀환 아닌 귀환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누가 뭐라 해도 그의 대표작은 단연 <500일의 썸머>인 탓이다. 그리하여 홍보 문구 때문이 아닐지라도, 그의 새 멜로 영화에서 SUMMER 혹은 AUTUMN을 찾아 나서는 시선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 영화 <500일의 썸머> 스틸컷


 하지만 이내 길을 잃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빙보이 인 뉴욕>에는 SUMMER는 말할 것도 없고, AUTUMN도 없기 때문이다. 둘의 부재를 장담하는 근거는 <500일의 썸머>에서의 썸머(주이 디샤넬 扮)와 톰(조셉 고든 레빗 扮)이 나누었던 “감정적 엇갈림”이 누락되었다는 확신에서 비롯한다. <500일의 썸머>는 두 사람이 곧 세계이고 우주였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가운데 썸머를 사랑하는 자신을 꾸준히 사랑해나가는 톰과 이런 톰이 더는 자신을 위로할 수도 톰과의 감정적 교감을 나눌 수도 없다고 판단한 썸머가 마치 우리의 마음속을 들어왔다 나간 양, 현실적인 “감정적 엇갈림”을 스크린에서 시연해 보였음이다. 그러나 그 정도 깊이의 “연애의 이해”를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분명 아쉽지만, 당연하기도 하다.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연애라는 관계 속 감정의 행보를 추적하던 <500일의 썸머>와는 달리 <리빙보이 인 뉴욕>은 사건이 중심이 되어 극이 전개되는 그야말로 전혀 다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500일의 썸머>를 감명 깊게 감상한 관객일지라도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는 그 시선을 거둠이 바람직하겠다. 배급사의 홍보문구를 이해는 하지만, 영화 외적인 요소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될 노릇이겠다. 수정하기에는 늦었을지 모르니, 더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성장기’의 외형을 갖춘 <리빙보이 인 뉴욕>


 전작과는 다른 구성임을 눈치챘다면 재빠르게 <리빙보이 인 뉴욕>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귀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주된 화자는 둘이다. 하나는 남자 주인공 토마스 웹(칼럼 터너 扮)이고, 다른 하나는 웹의 이웃이자 복잡한 관계인 제랄드(제프 브리지스 扮)이다. 우선 제랄드를 보자. 제랄드를 화자 중 한 명으로 꼽음은 그가 기이한 이웃의 역할 이외에도, 영화 속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극 중에서 작가로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웹의 성장과 방황을 지켜보며 이를 소설로 옮겨적고 있기에 영화 속 그의 문어체를 담은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런데 확신에 찬 말투와는 달리 세상에 대한 그의 관점은 흐릿하거나 심지어는 염세적이다. 이는 반복해서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임을 주지한다거나, 예이츠의 시 일부를 인용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었으나, 가장 악한 자들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 William Butler Yeats, “The Second Coming” (1919) 중(中)


 그런데 이 문장들이 웹을 향하면 희망으로 전이된다. 인생은 알 수 없으니 부딪혀보라고 말함이다. 감상의 시간이 제법 지날 때쯤이면, 이 내레이션이 제랄드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청년 웹에게 전하고 싶은 말임을 눈치챌 수 있다. 물론 그가 왜 그러하였는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짜잔하고 등장한다. 이제 또 한 명의 인물 웹을 보자.


**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스틸컷


 웹은 고민 많은 청춘이다. 임자 있는 친구를 사랑하던 연애는 갈 길을 잃고, 작가의 꿈은 멀기만 하다. 얼핏 힘겨운 이 땅의 청춘들과 비견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타당한 비교가 될 수 없다. 사는 곳이 뉴욕이라는 터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부모를 둔 아들다운 ‘선택적 난관’을 겪고 있음은 주요한 차이로 꼽을 만하다. 여기서 굳이 ‘난관’을 수식하는 표현으로 ‘선택’을 운운함은 주인공이 얼마든지 더 나은 삶을 살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입장에 있음을 주지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이런 배경만을 놓고 보자면 웹은 자립은 했으되 자립할 수 없는 소년으로 머무른다. 그런 그에게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그를 어른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까?


 주된 화자인 두 사람만 놓고 보자면 <리빙보이 인 뉴욕>은 조금은 색다르지만, ‘성장기’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 이제 웹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자.





성장 없는 성장기


 분명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은 웹이 부친(에단 웹, 피어스 브로스넌 扮)의 외도를 목격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사랑과 진로 앞에서 소극적이던 웹이 조한나(케이트 베킨세일 扮)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품고, 나름 적극적인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은 사건의 전이 정도로 봐줄 만은 하다. 하지만 이것을 성장이라 할 수 있을까?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몸을 부풀리는 어떤 동물처럼 조한나를 앞에 두고 대사의 톤과 속도를 높였던 웹은 어느새 조한나와 같은 침대에 눕는다. 웹의 입장에서 이 같은 변모는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 가능하다. 하나는 부친에 대한 복수심이다.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시름에 잠겨있는 가운데, 감히 바람이라니…. 화가 났을 법도 싶다.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매력적인 조한나의 존재이다. 사랑의 많고 많은 발단 요인 중에 ‘같이 자고 싶다’라는 마음이 차지하는 절대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느 쪽으로 해석하면 ‘성장’한 것이 되는가? 멋지게 성장한 성채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뒤늦게나마 극복해낸 것을 성장으로 볼 수 있을까? 몸이 달아올라 상대가 누구이건 함께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실제로 구현해내기만 하면 어른이 되는가? 적어도 이 변화를 통해 웹은 성장하지 않았다. 더 지켜보자.


***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스틸컷


 웹은 아버지가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이유로 작가가 되는 꿈에 소극적이었다. 물리적 거리는 어느 정도 떨어뜨려 놓았으나 여전히 부모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의존적이다. ² 그리고는 한번, 부친의 애인과 일탈을 즐겼을 뿐이었다. 부친이 승낙하지 않은 일은 할 수도 없던 자가, 여전히 부잣집 아들의 역할을 이행하는 자가, 쉬운 사랑에 그대로 흠뻑 젖어버리는 자가 어른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나! 복권에 당첨되듯 “내 DNA 안에는 역시 글이 있었음”을 확인한 이후에야 겨우 책방에 들어앉아 있으나, 이 외부적 동인에 의한 소극적 변신을 성장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성장영화가 있고, 그 터지는 살결들이 외쳤던 성장통의 울부짖음의 평균치를 낮추어서도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능동적이지 않았던 웹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부친의 애인을 유혹할 수 있을 정도면 어른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미국식 농담


 우리는 쉽게 뉴욕을 동경할지 모르겠으나, <리빙보이 인 뉴욕>이 건네는 농담에 웃을 수 없다면 재고를 바란다. 간략하게나마 정리해본다. 한 청년이 부친의 외도를 목격하게 되고, 이 부조리한 질주를 정지시키려다 부친의 애인과 사랑에 빠지는데 이를 곁에서 은근히 부추긴 자는 결국 청년의 친아버지로 밝혀진다. 그리고 자신의 모친은 친부를 잊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그를 다시 만나 우울증을 극복하고, 옛 부자는 호기롭게 일상의 안부를 묻는다….


 영화관에 앉아있으면 다른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웹의 친부가 제랄드임이 밝혀지는 순간 영화관을 감돌던 머쓱한 기운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 소위 벙찐 기운이 쉬 사그라지지 않음은 이 사태 앞에 영화 속 그 누구도 심각하지 않더라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이 땅의 드라마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영화는 그 지점에서 끝이 나버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주인공 각자가 지닌 아픔이나 관객에게 의아하게 비쳤던 부분들은 모두 해소된다.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로 봐줄 만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에게는 이것이 영화라기보다는 한 편의 잘 기획된 ‘몰래카메라’처럼 비추어졌다. 적어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 으하하하 웃으며….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이 한 편의 영화이건 몰래카메라 건, 이 같은 미국식 농담에 마냥 함께 웃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 뉴욕은 실제 비행거리보다도 더 먼 곳에 있음이다. 이 자각이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스틸컷








AUTUMN을 기다리며...


 영화가 아니고서라도 이 땅에 자막 달고 상영되는 모든 영상물이 들어온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닌 탓으로, 브라운관이건 스크린이건 스마트폰 화면이건 비치는 그들의 세계에서 정서적 괴리를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리빙보이 인 뉴욕>에서 느낀 감상이 신기하기는 하다. 그리하여 재미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아쉽다. 꼭 홍보문구 때문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 감독의 후속 멜로 영화가 돌아온다고 했을 때, 그 이름이 SUMMER이건 AUTUMN이건 분명 기대하지 않았던가!


 마침 계절도 가을이다. 섬세한 연애의 오만가지 지경을 보며 무릎을 치고, 어떤 이를 생각하며, 옛 추억의 시간을 소환할 마크 웹 특유의 AUTUMN을 조심스럽게나마 기다려본다.








참고

¹

- 다음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2017)>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70302#1207632


²

- ‘경제적 의존’은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웹의 경제적 활동상이 분명하지 않고,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집을 이주하는 이슈가 등장할 때 부친이 새 집을 장만해주겠다고 이야기함은 ‘경제적 의존’을 짐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³

 - William Butler Yeats, “The Second Coming” (1919) 중(中)

 - 네이버블로그, 『레젠더의 성역』,  “신들의 영역” 게시판 중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gaewon&logNo=11003854043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다음 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2017)> 포스터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70302#1207632


*

- 영화 <500일의 썸머> 스틸컷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50232#501567


** ~ ****

- iMDb,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 (2017)>, Photo Gallery

http://www.imdb.com/title/tt0460890/mediaindex?ref_=tt_mv_sm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환상 _ 영화 <유리정원>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