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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Jul 03. 2022

비오는 날

20대 초반에 좋아하던 사람과 만나던 날이 있었다. 사귀는 건 아닌데 나는 사귀고 싶었던 그런 관계였다. 막 만났을 무렵 비가 오기 시작했고 나는 보라색 우산을 들고 왔으며 그분은 기쁘게도 들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한 우산 안에서 걸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작은 우산 꽂이에 힘들게 꽂으려던 나를 보다가 내 우산을 가져가 능숙하게 감아 넣는 모습을 보고 한번 더 반했었다. 그분과는 일년 후에도 여전히 사귀지 않는데, 나는 사귀고 싶은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전보다 훨씬 이뤄지기 어려워 보였다. 전부터 그랬지만 그 무렵의 나는 사랑 노래에 모두 그 사람을 대입해서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위치에 맞게 조금 우울한 노래를 들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한참 멀리 버스를 타고 나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신도시 같아서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산과 나무가 있던 곳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고 나는 왼쪽은 숲 오른쪽은 건물인 길을 따라 걸으며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듣고 있었다. 김광석님의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때의 마음을 반영하기도 해서였다.


길의 끝은 숲과 아파트로 막혀있었다. 끝에 다다를쯤 내 앞에는 비가 와서 더 푸르러진 숲이 보였었고 비는 세차게 내렸으며 김광석님은 더 세차게 노래하셨다. 그때 그 순간은 꼭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의 뮤직비디오 같았다. 이보다 더 이 노래와 잘 어울리는 장면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 노래에 어느 때보다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어떤 감정이든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나면 보낼 수 있다. 바로 그때가 그동안 겉돌던 우울함과 슬픔을 온전하게 느끼던 순간이었다. 힘껏 우울하고 슬퍼하니 그 감정들은 사라지고 기쁨이 느껴졌다. 충만함을 느낀 나는 조금 오래 서있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던 그 순간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남아있어서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씩 그 장면이 떠오른다. 내 청춘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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