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of my dad
점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란 새로운 유형의 루틴에 익숙해져 갈 때 쯔음, 한국으로부터 소포가 왔다. 한국에서 미처 다 챙겨 오지 못했던 나머지 옷가지들을 포함한 짐들이 이제 도착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터지기 직전의 흐물거리는 커다란 갈색 상자 두 개 안에는 마치 지나온 나의 전 생애가 들어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상자를 열어보면서 마치 다시 돌아가지 못할 전생을 열어보는 듯한 기분에 왠지 기분이 묘했다.
미국 대사관에 인터뷰를 하고서도 비자가 나오기까지 몇 달은 걸렸다는 후기들이 인터넷에 그토록 많더니, 막상 내 경우는 인터뷰를 본 지 삼일 만에 비자가 나와 버렸었다. 나를 인터뷰한 미국인은 내가 준비해 갔던 사진이나 자료 등은 그저 슬쩍 흘겨 보고는 얼른 짝꿍을 만나고 싶겠다며 내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종이 위에 탕탕 도장을 찍더니, 삼일 후에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총 한 십여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비자가 승인이 되었다.
비자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무척 기뻐하는 듯했고 어서 오라며 비행기표를 알아봐 주곤 했지만, 솔직해 지자면 나는 이 상황이 그저 반갑지만은 않았다. 비자도 나왔는데 굳이 한국에 더 있을 이유가 뭐가 있냐고, 어서 정리하고 오라는 그의 그 합리적인 재촉이 마음 한편으로는 좀 못마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몇 년, 한국에서 몇 년 이렇게 오가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그런 순진한 착각 중에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미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한 세 달 정도는 걸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비자를 이미 받은 마당에, 한 달 전에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로서, 딱히 한국에 더 있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이유까지는 생각이 나질 않아서 그렇게 생각보다 무척 빨리 나온 비자에 맞춰 비행기표도 예약하고, 다니던 호텔에도 퇴사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이렇게, 스스로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꽤 일찍 미국으로 오게 되었었다. 미국에 오기 이틀 전까지도 일을 했었고.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더더욱 아쉽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한 2주 정도라도 더 있다 올걸.. 이렇게 아예 미국에 쭈욱 살게 될 걸 그때 이미 알았더라면.
상자에서 꺼낸 옷에서는 눅진한 상자의 냄새가 스며들어가 있었다. 다 빨려면 시간 좀 걸리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상자의 냄새만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익숙한 냄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코가, 내 몸이, 내 영혼이 아는 냄새 같은 것이 함께 담겨 있었다. 우리 집의 냄새랄까. 우리 가족, 엄마랑 아빠, 내 동생, 이렇게 우리 가족의 냄새, 우리가 나누어 쓰던 그 비누 냄새 같은 것이.. 엄마의 기타 소리와 아빠의 소주랑 엄마의 맥주 냄새도 함께 담긴 듯한 그런 게.
상자에 있던 옷가지들과 책 같은 것들을 꺼내고 나자 상자 바닥에 있던 조그만 쪽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주 짤막한 글귀, 그렇지만 익숙한 글씨체. 나는 주저앉아서 울어 버렸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아빠는 삼 형제 중 둘째시다. 할아버지는 무척 엄하셨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분이란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러셨어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 셋, 누가 뭐래도 번듯하게 키우고 싶으셨지 않을까, 엄마의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수 있도록.
아빠가 아홉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암이셨다고 했던가. 지금은 기억이 많이 희미하다고 하시던 아빠는 엄마를 어릴 때 보내드린 덕분에 처음 내 외할머니, 그러니까 장모님을 만났을 때 '어머님'이라든지 '장모님'이라든지 하는 말이 더더욱 쉽게 나오지 않았었다고 술기운이 잔뜩 들어갔던 어느 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하셨었다. '엄마'란 말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할아버지는 아빠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빠는 수술을 받으시다가 돌아가셨다고만 했고, 아빠와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이자 나에게는 삼촌인-아빠는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과 결혼을 하셨으므로- 우리 삼촌으로부터 나중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사실 할아버지는 아주 간단한 시술 정도를 받는 중이셨고, 어쩐 일인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학교에 있던 중에 너무나 갑작스럽게 할아버지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렇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크게 무너졌었다고 했다. 의료사고 같은 것이었다고.
아빠를 포함한 삼 형제는 다행히 다정한 작은할아버지댁에서 맡아 키워주셨다. 그래도 아빠는 이미 고등학생이었기에 이삼 년쯤 후부터는 스스로 돈도 벌며 독립을 할 수 있었다고. 어릴 때는 무척 덤덤하게 들었던, 울 아빠가 아직 '아빠'이기 전의 이야기들.
간혹 술기운이 들어가면 아빠가 하시던 말씀이 있다.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으면 우리 나은이 진짜 이뻐하셨을 텐데."
그리고 그에 이어 꼭 나오던 말씀,
"아빠는 오래오래 살아야지.
우리 딸 그늘이 되어줘야지. 부모 그늘이란 게 있더라.
아빠는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나은이 그늘 되어줘야지."
그리고, 하나 더
"아빠가 미안하다."
작은 쪽지에는 아빠의 글씨체가 담겨 있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잘 살아. 잘할 거야.' 이 정도의 말.
근데, 나는 그 글씨체가 보이자마자 무지하게 울어 버렸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흘러넘치도록 나왔다. 늘 아빠가 미안하다고 하셨었는데, 사실은 내가 아빠한테 무척 미안해져서. 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던 아빠에게 나는 늘 받기만 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몸이 미국에 있었지만, 그래도 힘이 났던 것은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부모님의 그늘이 이 먼 곳에까지 뻗어 나와 내 위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이러고만 있을 일이 아니었다.
나: 허니, 나 허니네 회사에서 일할래.
짝꿍: 응.
그가 CFO로 있던 회사에서 어카운팅팀 어시스턴트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었다. 그를 내 상사로 두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탐탁지 않고 해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던 중이었는데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상자를 받고 아빠의 짤막한 쪽지를 읽고 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어카운팅팀 일을 배우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되리라.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 호텔 재경부(재무팀)에서 일을 했었지 않나. 메리어트라 미국 계열 회사였기에 미국인 상사에게 맞춰 영어로 된 엑셀을 썼고, 영어로 리포트를 작성하고, 영어가 적당히 섞인 회의를 해야 하기도 했었으니, 일을 못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까짓 거.
못 할 게 뭐 있어 내가.
울 아빠 딸인데.
그렇게 나는 또
새로운 나를 알아갈 결심을 했고,
당장 그다음 날부터
출근을 시작했고, 그리고 그렇게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마. 녀. 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