떫은 카레는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주님, 감사합니다. 제 기분 맛있게 드십시오!
화근이었습니다. 진짜로 제 기분을 잡숫고 계신가 봅니다. 바로 다음날 나는 권태로워졌습니다. 눈꺼풀을 들추는 일조차 싫증이 나니 읽기와 쓰기는 머나먼 별 같습니다. 알 바입니까. 원래 그 정도 거리였습니다. 말하기・듣기・쓰기 같은 과목이 중요했던 적은 내 기억엔 없습니다. 언젠가 말했죠. 금성에서의 기록이 소멸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즉 깨달았습니다. 도덕, 윤리 같은 과목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생신분임에도 한동안 교과목을 전혀 공부하지 않던 때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런 과목들은 겨우 한두 개 틀릴까 말까였습니다. 알 바입니까. 원래 그 정도 거리였습니다. 부각된 적이 없습니다. 유행 한번 타지 않았습니다. 비너스와 가까운 별들이 반짝대는 것은 결코 칭찬받을 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별이 떨어져야 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제야 박수를 치고 소원을 빌고 입을 맞추고 출정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칭찬을 대신 받았습니다. 그렇게 별자리가 이어져왔습니다.
냉소나 허무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평화의 이미지와 가깝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없음입니다. 고통도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기는 대부분 물러갔지만 한기가 거실을 대신 날아다니기에 나는 패딩을 껴입고 구부정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발가락부터 종아리까지 감각이 없는데 기분도 그렇습니다. 마비랄지 마취 같은 게 되어져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저 희뿌연 하늘 같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예감이 들지 않습니다. 내 안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귀를 기울이거나 말리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대도 상관없겠습니다. 그것과 나는 그 정도 거리입니다.
그런대로 쓰고 있습니다. 마치고 나면 한꺼번에 밀려올 것입니다. 첫눈, 전류, 고통, 욕망, 삶 같은 수많은 수식을 가진 그것이요. 때문에 돌연 부끄러워질지도 모르고 두려워 숨고 싶어 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불킥이라는 말에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본 적도 없는 데다 이불을 왜 발로 찹니까 먼지 나게스리.
이런 때에는 고쳐 적으면 안 됩니다. 패각류의 유생처럼 부유해야 합니다. 힘을 주어 도중에 마취가 풀리기라도 한다면 여행은 거기서 끝입니다. 다리가 저려올 것입니다. 마치지 못한 채로 따개비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 것입니다. 지금은 겨우 다리지만 마비는 차차 머리끝까지 차고 올라 머지않아 바위의 장식이 될 것입니다. 삶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시처럼 함축되거나 장편소설로 이어집니다. 일생의 고통도 총량은 같지 않겠습니까. 해류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내버려 두면 어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먼저 죽는 이유와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압축된 용기이자 저항이기 때문에 무엇에든 곧잘 투신합니다. 그런 그들이 바보입니까 천재입니까 나그네입니까. 누구보다 삶을 사랑한 이유일 것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견디지 못해 죽고 싶은 마음을 아십니까. 예수의 마음은 모르지만 그 마음이라면 모르지 않습니다. 기꺼이 빼앗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권태로울 때도 먹기는 해야 합니다. 먹어야 하고 닦아야 하고 싸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차츰 나빠질 것입니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신생아처럼 눈물도 없이 가짜로 울어재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올 봄이 성악설 같은 게 돼서 피곤해집니다.
밥이나 먹으며 기다려봅시다. 권태가 지나가길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나는 모릅니다. 알기 원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나는 고집스러운 데다 평범해 보이지도 않는 듯합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나 역시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지만 지금은 의미가 다릅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중산층 따위에 속하는 것이 아닌 중도의 길을 묵묵히 걷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라고 권태가 말해줍니다.
'마당에서 딴 감입니다.' 현관문 앞에 물끄러미 놓여진 검정 비닐봉지를 발견했습니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연립주택 주위에는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면 닿는 단감나무도 있지만 꽃밭도 있고 소나무도 있고 단풍나무도 있고 아카시아나무도 있고 오늘의 주인공인 대봉감이 달린 나무도 있습니다. 이만하면 연못이 없는 게 수상할 정도인데 그건 아마 품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적엔 마당이란 게 무척 넓어서 때때로 친구들이 놀러 오면 공도 차고 배드민턴도 쳤지만 이제는 마당이 너무 좁아 보이는 데다 놀러 올 친구도 없기 때문에 발을 들이지 않습니다. 아마 누군가 놀러 온다 해도 마당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거기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곰개미를 잡고 놀까요 단풍나무를 흔들어 추락하는 헬리콥터 부대를 구경할까요. 축구공이 등나무 벤치 위에 걸린다 해도 이제는 궁리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더 이상 마당에서 뛰노는 어린이가 없대도 감은 잘 자랐습니다. 하기사 이 떫은 감은 마당에서 유일하게 어른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봉감은 다 익어도 떫어서 홍시나 곶감으로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걸 어린이들이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수년 전 이 집으로 돌아온 해에 받아 들었던 대봉감도 이 어린이는 떫다고 죄다 갖다 버렸더랬습니다.
대봉감을 맛있게 먹으려면 따뜻한 물에 며칠 담가 두라고 합니다. 그래야 탄닌 성분이 어쩌고 탈삽이 저쩌고 해서 홍시가 된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먹어야만 합니다. 얼마 전 포도도 끓여 먹은 마당에 감을 요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돼지고기와 양파가 있으니 카레가 어떨까요. 카레를 먹겠습니다. 카레로 떫은맛을 탈삽시켜보겠습니다. 카레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깊어지니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어린이는 아니겠습니까.
좋아하는 앞다리살이 올해는 이상하리만큼 줄곧 비싸더니 얼마 전 가격이 훅 떨어졌길래 왕창 사다가 얼려둔 참입니다. 식량과 생필품은 쟁여놓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밖에 ~제발 사주세요~ 말하는 것들은 쇼핑할 때만 잠깐 기분 좋고 막상 내 것이 되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실은 꽤 오래전부터 소유한다는 것에 묘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었으면 내보낼 수 있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
바람의 손자, 이정후.
그리고 감자의 아빠, 그것입니다.
확실히 감이 좋지 않습니다.
웃기지도 않고요.
카레에 비트를 넣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보다 저렴한 채소거리를 찾다 보니 이모양입니다. 덕분에 올해는 당근을 전혀 맛보지 못했지만 비트에서 당근 맛이 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비트가 카레를 더욱 먹음직스러운 빛깔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토마토는 아직까지도 사 먹을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나면 홀토마토를 가끔 이용합니다. 기후변화가 무섭습니다. 인간은 돈에 더욱 절실하거나 단념하거나 이상한 짓을 해야 합니다.
비트는 여전히 당근 맛이 나고 감에서는 달달한 감자가 느껴졌습니다. 덜 빠진 탄닌 성분 때문에 흡사 와인 덩어리를 씹어먹는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고기 한점 먹고 감조각 하나 집어 먹으면 입안이 파인다이닝입니다. 다행인지 소스는 떫지 않았습니다. 소스가 떫어지고 감은 단맛만 간직하고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카레가 실패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품지 못하는 재료가 없습니다. 닮고 싶은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