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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버트 Jul 28. 2021

살아있는 오늘

어수선한 시절을 산다. 

이제 마스크는 외출 필수품이 되었고, 기능과 패션을 살핀다. 

이러다가 인류가 이대로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혹은 장기간의 마스크 사용으로 안면의 진화학적 변이라든가, 혹은 마스크를 끼고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마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오래 무언가를 걸치고 있으니 귀, 눈, 입 기타 등등 우리 신체에 끼치는 영향도 꽤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간이 길어진다면. 

.

'작년 이맘때, 네가 여기 있었단다'하고 알려주는 알림이 여기저기 뜬다.

아일랜드,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는 알림이 뜰 때마다 묘한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가슴이 아리다.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 짓고 함께 여행했던 이에게 전화를 건다. 우리가 작년에 거기 있었다 나누는 말에는 즐거움과 설렘이 교차된다. 좋았다. 혼자 했던 여행 끝에 둘이 했던 몇 날의 여행은 오래 가슴에 남아있다. 


 독일 마부룩 골목을 누비고 매일 오르던 꼭대기 성에서 안개에 묻히거나 노을을 보던 시간, 랩탑을 끼고 공원에 앉아 근처에 있는 새들을 가만히 보던 시간. 해마다 가던 연수에서 어느 해에는 발목이 부러져 10시간 넘게 응급실에서 기다리고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해 연수받던 그때와 사람들이 호의를 베풀어 주어야 내가 편해지는 그런 삶이 어떤지....... 슬프고도 진하게, 아프고도 격하게 체험했던 시간도 있었다. 


맞다, 몇 년 전에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세계 그 어느 곳, 시원한 나라를 찾아 여행 중일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며, 도시마다 내려 며칠씩 여행하고, 가고 싶었던 나라들을 거쳐, 그린란드에 가서 몇 달을 살다 돌아오리라던 꿈은 기약 없이 연기되었다. 남들이 한 달을 걷는 까미노를 두 달을 잡으면 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간, 영국 서해에서 동해까지 걷는 CTC 트레일을 걸으리라던 야심 찬 계획도 일단은 접어두었다. 너무 오래지 않은 시간 뒤에 그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연일 33도 아니 35도 이상을 육박하는 날씨다.

뜨겁고 답답한 공기에 놀라 어디로든 에어컨 있는 실내로 들어갈 수 있는 나와 달리 그렇지 못한 환경의 사람들은 어떻게 견딜까. 중간중간 끼어드는 죄책감, 합리화, 망각 등 기타의 기술을 이용해 그 마음을 저 밑 서랍에 넣고 닫는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커피를 내리고

작은 빵 하나를 데운 다음 방 문을 연다.

적어도 몇 시간은 지나야 이 문은 열릴 것이다.

어디 가지도 못하는 이 시절, 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프로젝트를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이루어내려 한다.


뉴스란에 뜨는 헤드라인을 보지 않은지 꽤나 지났다.

어찌 보면 도시에 살지만 꽤나 자연인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오늘은 헷갈리고 애매한 개념을 확실하게 내 식으로 정리해 내는 것, 그게 목표다.

읽고 있는 개론서는 독일어를 번역한 책이고, 새로운 개념이다 보니 내용이 더 헷갈린다.

여러 책을 뒤져보아도 매끄럽게 개념을 전달하는 내용이 드물다. 논문들도 문장이 뒤죽박죽이어서 혼란스럽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논문에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있어 논문 쓸 때도 힘들고 짜증스러웠었다. 나름대로 논문에 녹여 쓰기는 했지만, 적어도 내가 읽고 있는 것이 무언지 정확하게 알고 싶다. 


전투에 임하는 사람처럼

커피와 물 그리고 랩탑을 들고 앉는 마음이 제법 비장하다.

오늘은 외출 계획이 없으니 가능할지 모른다.


이게 무언지, 추상적인 개념을 내 식으로 정리하는 것

도전 욕구가 불끈 쏟는다.


근사한 곳에 가고 멋진 것을 사고 재밌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일은 나와 거리가 있다.

생각해 보면 늘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나서는 것보다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편하다. 

그러나 나는 내 앞의 그들의 행동과 태도 말을 훑고 읽는다.

한 걸음 물러서 지켜보면 쉽게 보인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고요히 내 식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좋다.

이 어수선한 시절에 어떻게 나를 지켜야 하는지 안다.

내가 어떤 곳에 있고 어떤 일을 할 때 편안해하는지 본다. 

원하는 나를 만들 수 있고, 지킬 수 있고, 볼 수 있고 할 수 있어 고맙다.


소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원치 않는 삶이다.

시끄럽다.

많은 제약이 가해져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스스로 이루어내려 노력하는 쉰여덟의 내가 

아직은 고맙고 기특하다. 


후유증이 남은 왼쪽 몸을 보면서, 

마비되지 않아 걸을 수 있는 몸

멀쩡히 기능하는 사고, 

음식을 넘길 수 있는 식도와

숨은 차지만 상담하고 강의할 수 있어서

그래도 진통제로 이상감각의 고통을 잊을 수 있어서 

퉁퉁 부어 내 몸 같지 않은 13킬로 부해진 몸을 보면서,

그래도 어떻게 하면 부기가 가라앉고, 

대책 없는 알러지를 다스릴 수 있는지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되어 기쁘다.

이런 게 시간이 주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이 우주에 살면서 

좋은 것, 좋은 사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사람,

황홀하고 찬란하고 기쁘고 뜨겁고 

슬프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냉혹해서 아름답고 냉정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알고 

보고

들으면서 

세상을 읽고 체험할 수 있으니


살아있는 오늘은 

생각지도 못하게 받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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