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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버트 Mar 28. 2022

진달래꽃을 꺾다가

갑자기 무서움이 확 달려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았다. 

촘촘히 무리 지어 선 분홍색 진달래 꽃나무 사이로 멀리 담배밭에서 일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 저기 있구나.

그 새 멀리도 왔다.'


처음 시작은 진달래꽃을 꺾겠다는 마음이었다. 한 곳에서 진달래를 매만지다 보면 저쪽에 핀 진달래의 빛깔이 더 진하고 탐스러웠다. 거기에서 진달래를 꺾다 보면 큰 바위 옆 양지바른 곳에서 소복이 핀 진달래가 나를 불렀다. 그렇게 유혹에 빠져 정신없이 산을 헤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산 중턱까지 와버렸다.


땀범벅이 된 이마 위로 한줄기 바람이 훅 지나갔다.

그 바람소리를 빼면 내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들만 소리를 치고 있었다.

산중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어서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내가 선 곳은 여기저기 한 무더기로 피어난 진달래꽃나무와 소나무, 막 연둣빛으로 피어나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는 떡갈나무 이파리로 눈부시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에 둘러싸여 어디엔가 있을 사람들의 흔적을 찾았다.


아, 저깄다.

꽃그늘 사이에 머리를 디밀고 바라다본 부모님은 나른한 햇빛 너머에서 마치 늪에 빠진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순간 아까의 그 뜨거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끝없이 이어지던 단조롭고 지겨웠던 작업의 과정도 떠올랐다.  


아마도 지금 저곳은,

긴 밭이랑에 일정한 간격으로 동그란 구멍을 내고, 그 작은 구덩이마다 검은색 포토에서 뽑아낸 초록색 식물 하나씩이 메꾸어지고 있을 터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빛으로 빛나는 물조리개에 담긴 물을 질서 정연하게 누운 담배 모종들의 뿌리에 붓고 있었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그쯤은 그려낼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진달래꽃을 꺾으러 가겠다고 선언한 뒤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야트막한 산을 찾아들어가 한 발 한 발 햇살 아래에서 눈부신 진달래를 향해 걸었다.


눈 발이 어지럽게 흩날리던 날, 청하 시장 한 모퉁이에서 검은색 동그란 구멍마다 익어가던 풀빵은 아주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기다림에 은혜 갚듯 정확한 개수만큼 찍혀 나와 보는 이들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내가 물을 주었던 그 작은 구멍에서 부모님이 기대하는 소출이 생기기까지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일을 왜 할까?

열한 살 여자아이의 생각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이야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그 일을 해야 가을에는 목돈을 만질 수가 있었던 부모님의 살림살이를 이해하지만, 어린아이의 눈에 그 일은, 대단히 고단하고도, 위험하고 지겹고 힘든 일일 뿐이었다. 


저렇게 담배 모종을 심는 일을 시작으로, 한 여름 땡볕 아래에서 하나씩 딸 때마다 진이 묻어나는 이파리를 딸 것이었다. 일꾼들을 모아 모아 밤까지 불을 켜고, 무성한 그 담뱃잎을 꿰어 마치 하와이안 치마처럼 주렁주렁 엮을 것이었다. 그리고 동네에서 용감한 장정들이 높이 솟은 담배 굴에 들어가, 줄줄이 꿰어진 담배 치마를 일정한 간격으로 높은 천장부터 걸게 될 것이며, 그 후 아버지는 쉬지 않고 검은색 석탄을 때어가며 그 잎을 말릴 것이었다.


뜨거운 아궁이에 아버지가 석탄을 집어넣는 일을 몇 날 며칠 끝내면, 이제는 했던 그 일을 반대로 해야 하는 작업이 기다린다. 장정들은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샛노란 황금빛으로 마른 담배 치마를 한 줄씩 내리면, 새끼줄을 헤집고 담배 이파리를 하나씩 빼는 일이 기다렸다.


지난한 그 일이 기다리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지금 저기 계신 젊은 부모님은 

햇빛은 뜨거워 숨이 막혀오는 그 시간,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는 그때에도 담배 밭에서 고랑을 만들고, 이랑에 구멍을 찍고, 뿌리에 물을 머금은 초록색 담배 모종에 흙을 덮어나갈 것이다. 


멀리,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저기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꺾은 진달래가 한아름이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턱까지 올라 와 혼자 서 있다는 게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럴 때는 어서어서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


개선장군처럼, 

내가 걷는지 진달래꽃이 둥실둥실 떠가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어디 갔다가 왔노!

꽃을 그렇게나 많이 꺾었나!"


휴, 사람들에게로 왔다.

부모님한테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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