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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버트 Jan 15. 2024

모래 한 줌


   배낭을 메고 현관을 나섰다. 한 발을 내딛는데, 아찔하다.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얼음으로 뒤덮여 반짝인다. 거대한 빙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어린 시절 그 썰매가 있다면 신나게 타고 달려도 될 만큼 반짝거리는 얼음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살금살금 미끄럼을 타며 걸었다. 노인들은 오늘 댁에 계시는 게 좋겠다는 안내방송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잔뜩 중심을 잡으며 조심조심 걸었다.


   그런데 아뿔싸! 계단이다. 벚꽃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에는 발끝으로 꽃잎을 차며 코를 킁킁 거리며 걸었던 그 계단, 노을이 질 때 아득한 마음으로 떨어지던 붉은 해를 배웅하던 그 계단이 오늘은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있다. 


   휴일이었던 어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봄비인가?”하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날이 포근했다.  오늘 외출 전, 확인해 본 기온은 영하 2도였으니, 밤새 그 비는 바짝 날 선 얼음이 된 모양이다. 얼음판이라고 말하기엔 그 미끄러운 정도가 심해 빙판이라 불러야 하나? 생각한다. 그 말이 그 말인데, 왜 어감이 다른 것 같지?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다보는데, 


   세상에나! 

   누군가 모래를 뿌려두었다. 잔뜩 긴장된 마음이 누그러진다. 모래를 밟으니 미끄럽지 않다. 무궁무진한 쓰임새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는 존재. 맞아 모래 네가 있구나. 


   고맙기도 하여라! 를 연발하며 길을 내려갔다. 저런 곳이 미끄러울지 어떻게 알고 내딛는 모든 걸음을 디딜 수 있게 모래를 뿌렸을까? 누군가는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했을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막상 눈앞에서 내 걸음을 구원해 준 모래를 보니 고맙고 감탄스럽다.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걸어내려가는 약 10분, 여러 생각이 스친다.  






   얼음 언 새벽, 찌르는 듯한 추위 속에서 이리저리 포대를 옮기며 모래를 던졌을 그 누군가의 시간, 그리고 그저 가만히 담겨있다 불현듯 내던져져 마침내 누군가의 발 밑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모래 한 줌의 시간. 


   이 모든 생각이 비록 나만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오늘 그 시간에 나에게 닥쳐와 제 존재를 증명하는 모래 한 줌의 인상은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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