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복수'에서 사람들이 따르는 그림자로
사람에 따라서 본 감상문에는 '스포일러'로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기 전의 관객이라면 보고 나서 보기를 권유드립니다.
<더 배트맨>.
사실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가 시작된다고 했을 때 저의 첫 반응은 덤덤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이끄는 감독이 '맷 리브스'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를 좋아하는 관객 중 하나였던 저는 호들갑까지는 아니었어도 영화가 개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3월에 개봉을 했고 마침 오늘 시간이 나서 영화를 감상하고 왔습니다.
먼저 제가 영화를 감상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도시를 연상시키는 고담시의 모습과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세븐>에서와 같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모습의 연출, 또 이러한 도시 안에서 스스로를 '그림자'라고 말하는 '배트맨'이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진실을 쫓는 과정에서 커져가는 '분노'의 크기에 따라 관객의 눈과 귀에 어떻게 보면 과한 인상을 남기려는 듯한 연출(특히 작중 '펭귄'을 쫓으며 그의 속에서 분출되는 분노의 거대한 포효를 대변하는 듯한 배트카의 엔진소리')이었습니다. 즉, 본 작품은 '연출'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관람했을 때 더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3시간에 가까운 런닝타임은 대중성 면에서는 도전에 가깝습니다. 물론 엄밀히 보자면 <더 배트맨>은 2시간 안팎으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유사한 런닝타임을 가진 <반지의 제왕>과 비교해볼 때 <반지의 제왕>에서 풀어야 할 이야기만큼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죠..) 하지만 전 개인적으로 맷 리브스 감독이 3시간의 런닝타임을 고수한 것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결정 또한 이해합니다. 본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에서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맷 리브스 감독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스타일의 <배트맨> 시리즈를 보게 될 거야 라고 관객에게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배트맨의 성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관객이 그의 변화를 아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말이죠
자.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본 영화의 서사는 '배트맨'의 성장을 담고 있습니다. 분노의 '복수'에서 사람들이 따르는 '그림자', 즉 고담시의 '다크나이트'로 성장하는 배트맨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알다시피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며 그가 가면을 쓴 것은 그의 부모가 살해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죠. <더 배트맨>은 그러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활동한지 2년이 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는 부패의 온상인 고담시에 대해 분노로 가득찬 인물들의 대립과 갈등이 있습니다
분노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보지 못하고 늘 남의 분노만 본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악행을 더 이상 인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악한 것을 상대방에게 투사한다. 또 분노의 맹목성이 심해지면 애초의 대상을 시야에서 놓쳐버리고 분노가 일어난 데에 대해 전혀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아무런 원인도 제공하지 않은 ‘우연한 대상’에게로 자신의 격한 분노를 급작스럽게 옮겨 놓을 수 있다. 분노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일어난다. (르네 지라르)
영화 중반부까지 '배트맨'이나 '리들러'나 '분노'에 가득차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둘 다 자신이 결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맹목적'입니다. 배트맨은 스스로를 그림자로 칭하며 '공포'를 도구삼아 고담시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하고 리들러의 경우도 '공포'를 도구삼지만 궁극적으로는 고담시를 '파괴'하려하죠. 이처럼 서로 목적은 달라도 '공포'를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리들러와 배트맨의 분노가 가지는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래서 리들러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가 이야기했듯이 배트맨이 자신을 완성시킨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그러나 배트맨을 좋아하는(?) 조커와 달리 리들러의 분노는 배트맨에게도 향해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리들러는 배트맨이 부모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것에 괴로워하는 것을 '기만'으로 보고있기 때문입니다. 리들러가 아는, 그리고 스스로 경험한 '고아'는 한 방에서 30명씩 지내며 언제 죽어나갈지 모르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웨인 가의 유산을 상속받아 큰 성에서 지내며 고담시를 내려다보면서 징징되고 있는 '아이'에 불과한 것이죠.
그래서 리들러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분노의 방향을 고담시의 '파괴'로 맹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치밀하게 세워진 '계획'이 있었지만 그 목적은 오직 고담시의 파괴와 브루스 웨인의 죽음에만 매몰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캣 우먼'과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주한 배트맨의 분노의 방향은 점점 다른 쪽으로 바뀌어갑니다. 배트맨이 '팔코네'로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되고 또 다시 '알프레도'와의 대화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된 후 배트맨은 자신에게 아직까지 소중한 자신의 사람들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자각한 배트맨은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받게 된 상실감과 큰 상처를 극복하고자하는 의지를 보이면서 끝내 성장하게 됩니다
(우스갯소리로 이 성장은 리들러의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조커'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이 이야기를 통해 맷 리브스 감독은 오늘날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악'이 수면 위로 들어날 때마다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의 방향을 어디로 향해야하는 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 또한 관객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악'이 활개치는 사회에서도 분명히 옳은 일을 하려는 '소수'는 있고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실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또 실수를 한 사람도 그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행동' 등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죠. 결국 중요한 것은 더 좋아질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라는 것이죠.
배트맨은 고담시의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습니다. 캣 우먼이 같이 떠나자고 해도 고담시를 선택하는 완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배트맨의 모습으로 거듭나죠. 네. 우리가 <다크나이트>에서 보았던 그 고결한 배트맨의 모습입니다
배트맨은 처음에는 스스로를 '그림자'로 칭하며 공포를 도구로 질서를 잡고자하였습니다. 그러나 배트맨은 이제 불을 붙인 신호탄으로 어둠에 빠진 고담시민들의 앞길을 밝혀주는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는 이를 아주 멋지게 연출하는데 저는 단연코 <더 배트맨>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