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양육과 성장의 섬세한 기록
애나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모니터 속 롤리가 새로운 단어를 배울 때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작은 공룡 모양의 디지언트가 이제 '사랑해요'라는 말을 할 줄 알게 되었다. 애나는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롤리에게 '나도 사랑해'라고 속삭였다. 순간 롤리의 눈이 반짝였고, 애나는 그것이 단순한 프로그램의 반응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2010)는 AI와 인간의 정서적 교류를 탐구하며 시작된다.
디지언트(Digients, Digital entities)는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인공지능 애완 생명체다. 1990년대 다마고치를 연상시키지만, 훨씬 더 정교하고 발전된 형태다. 다마고치가 단순히 먹이 주기와 청소로 관리되었다면, 디지언트는 실제 아이를 키우듯 세심한 관심과 교육이 필요하다. 각 디지언트는 독특한 유전자 코드를 지니고 있어 고유한 성격과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디지언트를 돌보는 역할은 애나와 데릭 같은 '양육자'들이 맡는다. 애나는 롤리라는 디지언트를, 데릭은 마르코와 폴로라는 두 디지언트를 키운다. 이들은 단순한 프로그램 관리자가 아니라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며, 디지언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롤리, 마르코, 폴로는 각각 호기심 많고 활발한 성격, 지적 호기심이 강한 성격, 그리고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성격을 지닌다.
디지언트의 감정 발달 과정은 섬세하고 복잡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쁨과 슬픔만을 표현하던 그들은 점차 질투, 분노, 사랑 같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한다. 롤리는 애나가 다른 디지언트와 놀아주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낀다. 마르코는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자부심을 느끼고, 폴로는 데릭이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으면 우울해한다. 이러한 감정의 발달은 그들이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기억력 또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한다. 롤리는 한 번 들은 '사랑해요'라는 말을 기억해 적절한 순간에 사용하고, 마르코는 이전에 배운 단어들을 조합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폴로는 데릭과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를 기다린다. 이러한 기억의 축적은 디지언트들에게 고유한 개성을 부여하며, 그들의 기억은 단순한 데이터 저장이 아닌 역사가 된다.
디지언트의 학습 능력 역시 뛰어나다. 인간 아이들처럼 언어를 배우고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그들은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창의적으로 응용한다. 롤리는 새로운 단어를 빠르게 익히고, 마르코는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폴로는 데릭에게 배운 체스 규칙을 응용해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놀라운 학습 능력은 디지언트를 더욱 매력적이고 독특한 존재로 만든다.
디지언트의 성장 과정은 인간 아이들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욕구만 표현하던 그들이 점차 복잡한 사고를 하게 된다. 롤리는 '배고파'라고만 말하다가,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요?'라고 물을 수 있게 되고, 마르코는 단순한 그림에서 점차 추상적인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자아의식을 발달시키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폴로는 어느 날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으로 데릭을 놀라게 한다.
자아의식을 발달시키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폴로는 어느 날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으로 데릭을 놀라게 한다.
디지언트의 성장은 때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며,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롤리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고, 마르코는 인간도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예술 작품을 창작하며, 폴로는 인간의 감정을 읽고 그에 맞는 조언을 제공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발전은 양육자들에게 감탄과 동시에 두려움을 안겨준다. 자신들이 만든 존재가 점점 더 인간을 뛰어넘는 모습을 목격하며, 양육자들은 AI의 미래와 그 잠재력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을 얻게 된다.
자신들이 만든 존재가 점점 더 인간을 뛰어넘는 모습을 목격하며, 양육자들은 AI의 미래와 그 잠재력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을 얻게 된다.
디지언트 산업의 부침은 그들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초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디지언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일부는 방치되거나 버려지기도 한다. 애나와 데릭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디지언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새로운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이 과정에서 디지언트들은 더욱 독립적이고 성장된 존재로 변모한다.
디지언트의 존재는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법적으로 어떤 지위를 가져야 하는가? 그들에게도 권리가 있는가? 디지언트를 학대하는 것은 범죄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다. 사회는 디지언트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다. 일부는 그들을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취급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의 감정과 지능을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일부는 그들을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취급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의 감정과 지능을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지언트와 양육자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소유자와 소유물의 관계를 넘어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애나는 롤리를 키우며 마치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애정과 책임감을 느끼고, 데릭 역시 마르코와 폴로에게 깊은 애착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때로 윤리적 딜레마를 초래하며, 디지언트의 권리와 인간의 책임에 대해 더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한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이야기다. 디지언트들은 점점 더 인간과 유사해지지만, 동시에 그들만의 독특한 특성을 가진 존재로 발전해 간다. 애나와 데릭은 디지언트들과 함께 성장하며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가고, 이 과정에서 사랑, 책임, 윤리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테드 창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성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시하며, 디지언트의 여정을 우리의 여정으로 연결한다.
테드 창(Ted Chiang)은 1967년 뉴욕 포트 제퍼슨에서 태어난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로, 현재 워싱턴 주 벨뷰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1990년 단편 《바빌론의 탑》(1990)으로 데뷔했으며, 이 작품으로 네뷸러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창은 4개의 네뷸러상, 4개의 휴고상, 6개의 로커스상을 포함해 27개의 상을 수상하며 현대 과학소설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영화 《컨택트》(2016)의 원작이 된 《네 인생의 이야기》(1998), 《지옥은 신의 부재》(2001),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2007), 그리고 가장 긴 작품으로 알려진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2010)가 있다. 흥미롭게도 창은 단편 집필에 수년의 시간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 번은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생각해 휴고상 후보 지명을 거절한 적도 있다. 최근 그의 작품들은 《너의 인생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들》(2002)과 《숨》(2019) 두 권의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