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재구성한 시간과 기억의 서사
유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떠돌았다. 화면 속 어머니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AI가 재현한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유진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조심스럽게 첫 대화를 시도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화면 속 어머니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유진은 이것이 단순한 프로그램 이상의 존재임을 직감했다. 정진영의《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2021)는 이렇게 AI가 시간과 기억을 재구성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서사를 탐구한다.
이 작품에서 AI는 고인이 된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재현한다. 사진, 일기, SNS 기록 등을 바탕으로 20대 후반의 어머니를 완벽히 구현한다. 이 AI는 단순한 시뮬레이션을 넘어 학습과 성장이 가능한 존재다. 그러나 AI 어머니는 자신이 AI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현재는 1990년대 후반이며, 유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딸이다. 이러한 설정은 시간의 선형성을 뒤흔들며 흥미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AI 어머니와 유진의 대화는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독특한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유진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AI 어머니와 공유하지만, AI 어머니에게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다. 반면, AI 어머니는 유진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과정에서 유진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기억은 재구성되고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AI 어머니와 유진의 대화는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독특한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AI의 학습 능력은 기억의 재구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AI 어머니는 유진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이를 자신의 기억인 것처럼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유진이 들려준 현재의 이야기를 AI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과거 경험인 것처럼 변형하여 기억한다. 이는 기억의 가변성과 주관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AI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서사를 드러낸다.
유진과 AI 어머니의 관계는 점차 깊고 복잡해진다. 유진은 실제로는 경험하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어머니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한다. AI 어머니는 유진의 현재 고민에 대해 젊은 시절의 관점에서 조언한다. 이 과정에서 유진은 어머니를 새롭게 이해하고,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시간과 기억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모녀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다.
AI가 재구성한 기억은 때로는 실제 기억과 충돌을 일으킨다. 유진이 알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과 AI가 보여주는 모습 사이의 간극은 유진에게 혼란을 준다. 이는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AI는 때로는 유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을 언급하거나, 유진의 기억과는 다른 버전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충돌은 유진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AI의 존재는 삶과 죽음, 기억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유진은 AI를 통해 돌아가신 어머니와 다시 소통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진정한 어머니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AI는 유진의 현재 모습을 알지 못하고, 유진 역시 AI가 보여주는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간극은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AI의 존재는 삶과 죽음, 기억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AI와의 상호작용은 유진의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진은 AI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이는 그녀의 현재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가족들과의 관계, 연인과의 관계가 AI 어머니와의 대화로 인해 재정립된다. 유진은 때로는 현실의 관계보다 AI 어머니와의 관계에 더 의지하게 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AI를 통해 세대 간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유진은 자신보다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세대 차이를 넘어선 이해와 공감을 경험한다. AI 어머니는 유진에게 젊은 시절의 꿈과 고민을 들려주고, 유진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내면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소통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AI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보여준다.
김초엽은 이 작품을 통해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AI 기술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을 기회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유진과 AI 어머니의 관계는 기술이 매개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현재와 과거,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복잡한 관계망을 만들어낸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결국 기억, 정체성,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AI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유진은 자신의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김초엽은 이 이야기를 통해 기술 발전이 우리의 가장 친밀한 관계에 미칠 영향을 탐구한다. 유진의 여정은 독자들에게 가족, 기억, 그리고 자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결국 기억, 정체성,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AI가 재구성한 시간과 기억의 서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와 관계의 의미를 탐구한다. 김초엽은 이 작품을 통해 기술이 발전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감정과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기술이 가져올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 그리고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정진영은 1981년 대전에서 태어난 한국 소설가로,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1년 장편소설 《도화촌 기행》으로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기자 출신 작가인 정진영은 언론사 내부와 기업의 카르텔 등 사회의 모순을 작품 속에서 다루며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침묵주의보》(2018), 《젠가》, 《다시 밸런타인데이》, 그리고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2021)가 있다. 특히 《침묵주의보》는 백호 임제문학상을 수상하며, JTBC 드라마 《허쉬》(2020)로 각색되어 방영되었다. 또한 정진영은 작곡가로서의 재능도 갖추고 있어, 2014년 '육지거북'이라는 이름으로 앨범 《오래된 소품》을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