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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영로스팅 Jan 08. 2025

중세 유럽, 마녀와 고양이

미신과 학살, 축제의 역설

종탑에서 던져지고 화형에 처해진 고양이들의 비명은 마녀로 몰린 이들의 절규와 뒤섞여 광장을 채웠다.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고양이와 마녀는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과 공포의 상징적 희생양이었다. 한때 신성함과 보호의 상징이었던 고양이는, 중세 종교적 광기 속에서 악마의 화신으로 낙인찍히며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종탑에서 던져지고 화형에 처해진 고양이들의 비명은 마녀로 몰린 이들의 절규와 뒤섞여 광장을 채웠다. 이러한 박해는 단순한 미신을 넘어, 인간의 두려움과 탐욕이 얽혀 빚어진 잔혹한 결과였다. 고양이는 인간의 무지와 두려움을 비추는 거울로, 중세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로 남았다. 그들의 희생은 단순히 잊혀질 사건이 아니라, 역사를 돌아보며 반성해야 할 중요한 교훈으로 자리 잡았다. 이 이야기는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성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깊은 울림의 경고이다.




벨기에, 고양이와 학살의 어두운 역사


1437년 봄, 벨기에 이프르(Ypres)의 광장은 낯선 흥분으로 물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탑을 올려다보며 설렘 어린 시선을 보냈다. 높이 솟은 70미터의 종탑 꼭대기에는 검은 자루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든 자루 속에는 고양이들이 갇혀 있었고, 그는 서슴없이 자루를 열었다. 자루 속 고양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내던져졌고, 군중은 환호로 응답했다. 당시 고양이는 마녀와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져, 그들의 희생은 축제의 일부가 되었다. 광장의 한 구석에서 소녀는 공포와 연민에 사로잡혔지만, 누구도 그 잔인함을 문제 삼지 않았다.


중세의 이프르는 고양이와 복잡한 관계를 가진 도시였다.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서플란더스 지방에 위치한 이 도시는 직물 산업으로 번영했지만, 쥐와 해충을 막기 위해 들여온 고양이들이 과도하게 번식하며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 관리들은 매년 사순절 두 번째 주 수요일, '고양이 수요일'이라는 날을 정했다. 이날 종탑에서 고양이들을 던지는 극단적인 행사가 열렸다. 수백 년간 지속된 이 행사는 1817년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잔혹한 관습은 당시 사람들의 미신과 편견을 잘 보여준다.


벨기에의 역사는 고양이 대량 학살로 끝나지 않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벨기에는 콩고에서 참혹한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다. 국왕 레오폴드 2세는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콩고 자유국을 개인 소유로 통치하며, 고무 생산을 위해 원주민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콩고의 인구는 기근, 질병, 학살로 급감해 1,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주민들은 손발이 절단되는 끔찍한 폭력을 당하거나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비극은 벨기에의 탐욕이 어떤 참상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레오폴드 2세의 통치는 인간 존엄성을 철저히 무너뜨린 잔혹한 사례로 남아 있다. 그는 콩고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간주하며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다루었다. '레드 러버' (Red Rubber) 정책을 통해 고무 생산량을 늘리려 했고, 이를 위해 마을 전체를 파괴하거나 원주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강요했다. 고무 생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은 손발 절단이나 가족을 잃는 비극적인 처벌을 받았다. 국제 사회가 이 만행을 비난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한 통치는 벨기에 식민지배의 탐욕이 낳은 최악의 결과 중 하나로 기억된다. 이 만행은 역사적으로도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참사의 교훈으로 남아 있다.


1908년, 벨기에 정부가 콩고를 직접 통치하면서 상황은 일부 개선되었지만, 강제 노동과 인종차별은 여전히 심각하게 남아 있었다. 벨기에는 콩고뿐만 아니라 르완다와 부룬디에서도 식민 통치를 지속하며 자신들의 정책을 강압적으로 실행했다. 특히 르완다에서는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인종 구분을 제도적으로 강화하여 차별을 고착화했다. 이러한 정책은 1994년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학살된 르완다 제노사이드로 이어졌다. 벨기에의 식민 지배는 1960년 콩고가 독립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깊게 남아 있다. 동부 콩고 민주공화국 집권당인 민주사회진보연합(UDPS)의 한 정치인은 "콩고인으로서 우리는 벨기에가 우리 나라를 식민화한 것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손을 자르는 잔혹함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벨기에는 콩고 식민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2020년 6월, 벨기에 의회는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자행된 범죄와 인권 침해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2년 반 동안 약 300명의 전문가와 디아스포라 대표들의 증언을 청취하며,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 부룬디를 방문하는 등 광범위한 활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2022년 12월, 자유주의 정당들의 반대로 공식 사과안 채택은 실패로 돌아갔다. 2022년 벨기에 국왕 필리프는 식민 지배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이는 공식적인 사과에는 미치지 못했다.


70미터 높이의 종탑 꼭대기에서 이번에는 살아 있는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 인형이 던져졌다.

벨기에는 학살당한 고양이에 대해서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대신, 학살이 벌어진 현장을 축제로 변화시켰다. 1937년부터 "카텐슈토트(Kattenstoet)"라는 고양이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 축제는 도시의 어두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동시에 고양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화려한 퍼레이드와 공연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3년마다 열리는 이 축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2024년 5월에 2018년 이후 처음으로 다시 개최되었다. 2024년 5월 12일 열린 카텐슈토트 축제는 약 5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며 고양이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70미터 높이의 종탑 꼭대기에서 이번에는 살아 있는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 인형이 던져졌다.


Ypres Cloth Hall (출처: Wikipedia)


카텐슈토트(Kattenstoet) 2018년 행사




중세를 품은 고양의 따뜻한 발자취


고양이는 중세 사회에서 단순한 동물을 넘어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길들여진 고양이는 로마 제국의 확장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고양이는 중세 수도원에서는 필사본을 쥐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자로, 귀족들 사이에서는 가문의 품격을 상징하는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쥐를 잡아주는 실용적인 존재로 실생활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법전에서는 고양이를 특정 역할과 책임을 가진 동물로 명시하며 사회적 가치를 부여했다. 고양이는 각 계층의 필요와 감정을 충족시키며 문화와 삶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중세 사회의 구조와 가치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양이는 중세 사회에서 단순한 동물을 넘어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중세 시대 수도원에서 고양이는 특별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13세기 초에 쓰인 《앵크런 위세(Ancrene Wisse)》라는 은둔 수녀를 위한 지침서에서는 수녀들이 오직 고양이만을 반려동물로 키우도록 권장했다. 고양이는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쥐로부터 귀중한 양피지 필사본을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엑서터 대성당의 기록에 따르면, 1363년부터 1366년 사이에 고양이의 분기별 급여가 13펜스에서 26펜스로 두 배 증가했는데, 이는 두 번째 고양이를 고용하여 쥐 퇴치 능력을 강화했음을 의미한다. 14세기 초 네덜란드의 한 시도서에는 실을 잣는 수녀 옆에서 흰 고양이가 실타래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수도사들은 필사본의 여백에 종종 고양이 그림을 그리며 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이처럼 고양이는 수도원에서 실용성과 애정을 동시에 받는 독특한 동물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고양이는 품격과 지위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13세기 영국 옥스퍼드셔의 Cuxham 장원 기록에는 고양이를 위해 치즈를 구입했다는 내용이 있어, 고양이가 귀족들로부터 세심한 관리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엘레노어 공작부인(1215-1275)은 도버성을 관리하며 고양이를 키웠는데, 이는 고양이가 해충 퇴치용으로도, 애완동물로도 여겨졌음을 나타낸다. 초상화에서도 고양이와 함께 포즈를 취한 귀족들이 종종 보이는데, 이는 고양이가 단순한 애완동물을 넘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음을 보여준다. 13세기 Beaulieu 수도원에서는 'Mite'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기록에 남아 있어,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관습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피에트로 로렌제티의 《최후의 만찬(Last supper)》에는 벽난로 옆에 웅크린 고양이가 등장하며, 이는 고양이가 가정의 따뜻한 일부로 여겨졌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귀족 사회에서 고양이는 단순히 귀여운 동물이 아니라, 가문의 품격과 애정을 표현하는 존재였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고양이는 실용적인 목적과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10세기 웨일스의 Hywel Dda 왕의 법전에는 고양이에 대한 특별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데, 고양이가 죽거나 도난당했을 때 보상 방식을 명확히 규정했다. 법전은 또한 고양이를 '뛰어난 쥐잡이'로 보증할 때만 판매를 허용했으며, 이는 고양이의 실용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중세 아일랜드의 법전 'Catslechta'는 고양이를 목동 고양이, 쥐잡이 고양이, 경비 고양이, 아이들의 놀이 친구인 새끼 고양이, 단순한 애완 고양이 등으로 세분화하여 구체적으로 분류했다. 이 법전에서는 고양이가 쥐를 쫓다가 사람을 다치게 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7세기 영국의 수수께끼 책에서는 고양이를 '가장 충실한 여성 경비원'으로 묘사하며, 고양이의 신뢰성과 애정을 나타냈다. 이러한 기록들은 중세 시대 일반인들에게도 고양이가 실용적 가치뿐 아니라 정서적 위안과 유대감을 제공하는 중요한 존재였음을 잘 보여준다.

최후의 만찬(Last Supper) (1320), by Pietro Lorenzetti.

출처: Web Gallery Art


Cat king, Germany, circa 1450. Scheibler'sches Wappenbuch – BSB Cod.icon. 312c


From Ms. Ludwig XV 1 (83.MR.171), fol. 48, in the collection of the Getty Museum.




마녀와 고양이, 잔혹의 역사


1233년 6월, 로마의 라테란 궁전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독일에서 온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편지에는 루시퍼교라는 독일 북부 이단 집단이 검은 고양이 형상의 악마를 숭배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교황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이미 1231년 교회 재판소를 설립하고 1232년 10월에는 북부 독일에서 십자군을 선포하는 등 이단 척결에 힘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교황의 결심은 곧 'Vox in Rama(라마에서의 목소리)'라는 교서로 구체화되었다. 이 교서는 독일의 헨리 7세 왕과 마인츠의 대주교 지그프리트 3세에게 보내졌다. 교서에는 루시퍼교 신자들이 검은 고양이 형상의 악마를 숭배하고, 그 앞에서 끔찍한 의식을 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단속할 것을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교황은 이 교서가 가져올 파장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단순히 이단을 척결하려 했을 뿐, 무고한 고양이들이 희생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Vox in Rama' 교서는 중세 유럽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교황의 말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였고, 검은 고양이를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을마다 고양이 사냥이 시작되었고, 특히 검은 고양이들은 무차별적인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교황의 의도와는 달리, 이 교서는 고양이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의 시작점이 되었다. 어제까지 귀여운 반려동물이었던 고양이들이 갑자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검은 고양이들은 더욱 큰 위험에 처했다. 골목길에서 검은 고양이를 마주친 사람들은 십자가를 그리며 달아났다.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쫓겨나거나 더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


중세 시대 고양이 박해는 마녀사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고양이는 마녀의 사역마로 여겨졌고, 마녀들이 고양이로 변신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고양이가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자 모든 마녀의 우상이라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고양이를 키우는 여성들은 마녀로 의심받아 박해를 받았다. 특히 독신 여성이나 노년 여성들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던 16-17세기에는 고양이 학살도 함께 증가했다. 많은 도시에서 고양이를 죽이는 것이 축제의 일부가 되었고, 이는 마녀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1644년 3월, 영국 에섹스 주의 작은 마을 매닝트리에서 매튜 홉킨스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집 근처에서 7-8명의 마녀들이 6주마다 금요일 밤에 모여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홉킨스는 한 여성이 자신의 임프(악마의 사역마)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는 그 여성을 체포하고 검사했는데, 그녀의 몸에서  세 개의 '유두'를 발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홉킨스는 마녀 사냥에 뛰어들었고, 1647년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녀의 발견(The discovery of witche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그의 마녀 식별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며, 당시 영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홉킨스의 마녀 식별 방법은 그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피의자를 2~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계속 걷게 하는 '걷기' 기술을 사용했다. 이 방식은 피의자의 체력을 고갈시키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백을 유도하는 잔혹한 방법이었다. 또, 피의자의 몸에서 '악마의 표식'을 찾는 것도 주요한 식별 수단으로 여겨졌다. 점, 흉터, 혹은 여분의 유두 같은 특징이 그 표식으로 간주되었다. '수영 테스트' 역시 널리 사용되었는데, 피의자를 물에 던져 뜨면 마녀로 간주하고 가라앉으면 무죄로 판정했다. 


홉킨스의 책에는 고양이와 마녀의 연관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는 특히 고양이를 마녀의 사역마로 의심했다. 책에는 엘리자베스 클라크라는 여성이 "홀트"라는 이름의 하얀 새끼 고양이 형태의 사역마를 불러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다른 동물 형태의 사역마들도 언급되었는데, 엘레마우저, 파이와켓, 페킨 더 크라운, 그리즐, 그리디거트 등의 이름을 가진 임프들이 있었다. 홉킨스는 이러한 사역마들이 마녀의 몸에 있는 '악마의 표식'에서 피를 빨아먹는다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사회에 만연한 공포와 미신을 반영하고 있었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 유럽의 어둠 속에서 마녀 사냥의 불길이 타올랐다. 1400년부터 1775년까지 약 4만 명~6만 명의 무고한 영혼들이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었다. 독일의 숲에서는 2만 5천명 이상이, 프랑스의 들판에서는 5천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폴란드와 스위스의 산간에서 각각 4천여명,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마을에서 2천 5백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에게 마녀라는 혐의를 씌워 화형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내렸다. 스코틀랜드의 황야와 잉글랜드 초원에서도 학살은 이루어졌다. 특히 1560년부터 1630년 사이, 마녀 사냥의 광기가 절정에 달해 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서도 1692년 세일럼의 19명이 처형되었고, 마침내 1782년 스위스에서 마지막 마녀가 처형되면서 이 긴 악몽은 막을 내렸다.


중세 유럽의 어둠 속에서 마녀 사냥의 불길이 타올랐다. 

고양이 학살은 축제로 변모했다. 벨기에 이프르에서는 '카텐슈토트(Kattenstoet)'라는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에서는 고양이를 70미터 높이의 종탑에서 던져 죽였다. 이 잔혹한 관행은 1817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성 요한 축일(6월 24일)에 그레브 광장에서 고양이들을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는 '고양이 음악(Katzenmusik)'이라는 이름으로 고양이를 고문하는 행위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마녀사냥꾼 매튜 홉킨스가 1645년경 고양이를 이용해 마녀를 적발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처럼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고양이들이 학대당했다. 각 나라의 잔혹한 관행은 마녀사냥이라는 광기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고양이 박해의 결과는 예기치 못한 재앙으로 이어졌다. 고양이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자 쥐의 개체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는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의 확산을 가속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를 박해한 행위는 인간 사회에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양이 박해는 여성 혐오와 미신이 결합된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고양이를 키우던 여성들은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모든 것은 중세 사회의 편견과 공포가 만들어낸 참담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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