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 AI 허브가 될 수 있을까?

국가 AI연구거점 센터장·KAIST 전산학과 김기응 교수

by 경영로스팅
AI의 G3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버린 AI를 추구해야 합니다

김기응 KAIST AI 교수이자 ‘국가 AI 연구거점’ 센터장의 이 말은, 더 이상 AI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깨닫게 했다. 주권은 보이지 않지만, 기술 위에서, 그리고 이제는 공간 위에서도 경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2024년 10월, 서울 양재에 ‘국가 AI 연구거점’이 문을 열었다. 판교가 아니라 양재라는 선택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AI 생태계라는 지도 위에 새로운 좌표를 찍는 일이었다. 한국이 AI 주권을 실험하는 무대를 드디어 가지게 된 것이다.


정부는 이 거점을 2028년까지 946억 원을 투입해 글로벌 협력과 기술 개발의 중심지로 키우려 한다. 현재는 서울 AI 허브 본관과 교육동을 포함해 2,132평 규모로 운영되고 있으며, 2025년에는 강남 데이터센터까지 포함해 2,300평 이상으로 확장될 예정이다. 하지만 공간보다 중요한 것은, 이 거점이 살아 있는 연결망이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거점이 내세운 두 개의 연구 방향은 분명하다. 하나는 ‘뉴럴 스케일링 초월’이다. 더 빠르고 더 많이 계산하는 경쟁이 아니라, 더 똑똑하고 효율적으로 학습하는 길을 찾겠다는 다짐이다. 다른 하나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인지, 판단, 제어를 모두 아우르는 멀티모달 자율 로봇 기술을 통해, AI를 물리 세계에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제,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움직이는 지능을 꿈꾼다.


이 두 가지 방향은 단순한 기술 과제가 아니다. 뉴럴 스케일링 초월은, 더 많은 컴퓨팅 파워를 쓰는 방식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 에너지 소모와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적게 쓰고 더 잘하는 AI로 가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 자체가 무너진다. 반대로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은, AI를 언어 생성이나 이미지 생성에 머물게 하지 않고, 물리 세계에 직접 개입하고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이다. 인간과 기계, 환경 사이의 경계를 새로 짜는 일이다.


참여하는 주체들을 보면 이 실험이 단순한 연구 프로젝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KAIST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포항공과대학교 교수진 35명이 함께하고 있으며, 네이버클라우드, LG전자, HD현대, 포스코 등 12개 민간 기업이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MSIT),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서울시, 서초구청이 행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대통령실과 서울시장이 직접 개소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이 거점이 상징하는 국가적 무게를 말해준다.


양재의 실험은 서울에 머물지 않는다. 캐나다 몬트리올 학습 알고리즘 연구소(MILA, Montreal Institute for Learning Algorithms), 프랑스 국립정보과학응용연구소(INRIA, Institut National de Recherche en Informatique et en Automatique), 아랍에미리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인공지능 대학교(MBZUAI, Mohamed bin Zayed University of Artificial Intelligence), 미국 스탠퍼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 등 12개 해외 연구기관이 협력 중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국내에 상주하며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연결은 단발 이벤트가 아니라, 숨 쉬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서울 양재 모델을 이해하려면, 일본과 프랑스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서로 다른 현실과 선택이, 오늘 우리가 참고해야 할 이정표가 된다.


일본은 AI를 산업에 연결하려 했다. 2015년,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 National Institute of Advanced Industrial Science and Technology) 산하 인공지능연구센터(AIRC,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 Center)를 세웠다. 목표는 명확했다.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산업 현장에서 당장 쓸 수 있는 AI를 만드는 것이었다.


도요타는 자율주행을, 후지쯔는 헬스케어를, NEC는 물류 최적화를 추진했다. 대학과 기업은 거점을 매개로 실증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일본은 기술을 잘 만드는 것보다, 기술을 잘 활용하는 데 집중했다. 기술은 삶에 닿을 때 비로소 살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빠른 적용에 집중한 만큼, 근본적 혁신을 이끄는 기초 연구는 약해졌다. 일본은 선택했다. 모두를 다 가질 수 없다면, 가장 필요한 것을 먼저 붙잡겠다고.


프랑스는 반대 길을 택했다. 2019년, 파리 인공지능 연구소(PRAIRIE, PaRis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 InstitutE)를 세우고, 시작부터 수학, 물리, 철학 같은 기초 학문과 AI를 통합하려 했다. INRIA(국립정보과학응용연구소), CNRS(프랑스국립과학연구센터), ENS(파리고등사범학교)와 함께 ‘기술을 다시 사유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AISSAI(AI for Science, Science for AI) 센터는 이 흐름을 상징한다. AI를 과학적 발견 도구로 활용하고, 동시에 과학을 통해 AI의 원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프랑스는 시간을 서두르지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품을 수 있게 하려는 길을 걸었다.


일본은 속도를 선택했고, 프랑스는 깊이를 선택했다. 하나는 응용과 실증을, 하나는 기초와 철학을 품었다. 서울 양재는 지금, 그 두 세계의 경계 위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아직 양재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미완성 속에 가능성이 숨어 있다. 협력에서 연구로, 연구에서 실증으로, 실증에서 산업화로, 산업화에서 창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실제로 작동할 때, 비로소 생태계는 살아 움직인다.


김기응 센터장은 2025년 6월부터 외부와의 본격적인 소통을 시작할 계획이다. 스타트업이 들어오고, 민간 투자가 연결되고, 연구 성과가 제품과 시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생태계는 선언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만들어진다.


AI는 더 이상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프라의 문제이며, 사회의 문제이며, 결국은 삶의 문제이다. 서울 양재가 글로벌 AI 혁신의 심장으로 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AI 주권”이라는 말을 현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의 AI는 어디에서 기초를 다졌는가”라는 질문이 조심스럽게 던져진다면, 우리는 아마도 양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소란스럽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물어야 한다. 공간을 만든다고 해서, 흐름까지 만들 수 있는가. 기술을 세운다고 해서, 정신까지 세울 수 있는가. 양재는, 이제 그 답을 살아내야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