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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I 로스팅

기술이 국경이 된 시대

총칼보다 예리한 AI 패권 전쟁

AI를 둘러싼 전쟁은 이제 현실입니다. 총칼은 사라지고, 전장은 연구소로, 무기는 알고리즘으로 바뀌었습니다. HS 아카데미 이효석 대표는 기술은 전쟁의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언어는 달러, 금리, 에너지, 공급망까지 품고 있으며, 미중 기술패권전쟁의 전선들입니다. 스탠포드 AI Index 보고서도 AI는 이미 세계를 재편하는 현실이라 분석합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고금리와 달러 패권을 앞세워 자본 흐름을 통제하고, 자국 중심의 산업 복원을 추진합니다. 반면 중국은 보조금을 바탕으로 공급과잉을 유도하며, 기술 생태계를 자국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AI 기술 주권’이라는 같은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세계화 추이는 꺾이고 있습니다. AI Index 보고서에서 AI를 연결이 아니라 구획을 만드는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공급망은 연결이 아니라 단절의 기제가 되고, 데이터는 자산이 아니라 영토가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무역으로 연결된 지구’가 아닌, ‘코드로 나뉜 대륙’ 위에 살고 있습니다.


AI 패권은 세 가지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1) 컴퓨팅은 물리력, (2) 데이터는 학습의 연료, (3) 알고리즘은 판단의 설계도입니다. 이 세 축은 기술이면서 동시에 권력입니다. 지금, 미중은 이 권력의 축 위에서 총성 없는 경쟁 중입니다.


(1) 미국은 컴퓨팅 자산에서 선제적으로 움직였습니다. GPU 수출 통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통해 중국의 훈련 능력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23년 말, 화웨이는 7 나노 칩을 국산화하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AI Index에 따르면, 중국 모델의 성능 격차는 1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제재는 속도를 늦출 수 있어도 방향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2) 데이터에서는 중국이 앞서 있습니다. 13억 인구의 실시간 정보, 도시 단위 감시 시스템은 AI 학습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합니다. AI Index는 중국은 도시 전체를 데이터 생성 기계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기술을 쓰는 시대에서, 기술이 인간을 관찰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윤리는 언제나 한발 늦게 도착합니다.


(3) 알고리즘의 주도권은 여전히 미국에 있습니다. GPT, Gemini, Claude 등 미국 기업의 모델들이 글로벌 기준을 선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알고리즘을 만든 손들 중 상당수는 중국계라는 점이 이중 구조를 드러냅니다. AI Index는 미국은 폐쇄적 정책과 개방적 인재 구조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며 모순을 지적합니다. 뇌는 미국에, 세포는 아시아에 있는 셈입니다.


트럼프 정부의 ‘차이나 이니셔티브’는 과학자의 국적을 안보로 다뤘습니다. 바이든 정부는 이를 폐지했지만, 인재를 둘러싼 전략적 불안은 여전합니다. 이제 전쟁은 무기 창고가 아닌 연구소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총이 아니라 코드 한 줄입니다.


미국은 ‘과잉재정’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꺼냈습니다. 중앙은행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직접 반도체·배터리·전기차 같은 전략 산업에 자금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2024년 한 해에만 AI 인프라에 1,000억 달러가 투자되었고, 관련 규제안도 59건 발의되었습니다. 시장이 아닌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돈은 이제 가치보다 전략을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전략은 고금리, 고부채, 투자 왜곡이라는 새로운 리스크를 낳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멈추지 않습니다. 기술 패권은 단기 수익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이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 전선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반도체, 2차 전지, 디스플레이 같은 핵심 산업은 미국과 공급망을 공유하면서도, 중국 시장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을 택하면 다른 쪽이 흔들리고, 양쪽을 지키려 하면 모두에게 신뢰를 잃습니다. 전략이 아닌 균형은, 균형이 아니라 부유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싱가포르 총리의 말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싱가포르만의 길을 간다.” 이 문장은 단순한 중립이 아니라 설계의 언어입니다. 한국도 이제 산업 구조를 넘어, 기술 설계 국가로 도약해야 합니다. 방향 없이 유지되는 균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질문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기술 주권을 말하지만, 정책은 흩어져 있고, 민관 협력은 선언에 머물러 있습니다. AI Index는 “한국은 인프라는 강하지만 전략적 정렬은 부족하다”라고 지적합니다. AI는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인간의 침묵은 감지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술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술이 감지하지 못하는 결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결국, 전쟁은 질문에서 시작되고, 문장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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