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 아카데미 이효석 대표
'AI를 둘러싼 미중 패권전쟁'이라는 주제로 HS 아카데미의 이효석 대표는 소리 없는 전쟁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전쟁은 더 이상 무기와 병력이 오가는 전장이 아니었다. 달러와 금리, 공급망과 에너지, 그리고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이 세계의 힘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는 경고였다. 국가 전략의 중심이 기술로 이동했고, 그 기술은 이제 문명을 움직이는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무기가 아닌 알고리즘으로 전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은 금리와 달러 패권을 무기로 삼아 세계 자본 흐름을 재편하고 있고, ‘America First’를 외치며 자국 중심의 산업 복원을 가속화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막대한 보조금을 기반으로 공급과잉을 유도하며, 자국 주도의 기술 생태계를 확장 중이다. 두 국가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표를 향한다. 기술 주권, 그것이 이 전쟁의 실체다.
피터슨 연구소는 1945년 이후 확산되던 세계화가 2010년대부터 꺾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공급망이 연결이 아닌 단절의 기제로 작동하고, 데이터는 자산이 아닌 영토가 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기술은 국경이 되었고, AI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구가 되었다. 더 이상 세계는 ‘무역으로 연결된 지구’가 아니라, ‘코드로 구획된 대륙’으로 나뉘고 있다. 글로벌은 끝나고, 디지털 지정학이 시작되었다.
AI는 세 가지 축 위에 선다. 컴퓨팅, 데이터, 알고리즘. 이 셋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를 결정하는 기반이다. 컴퓨팅은 연산이라는 물리적 힘을 말하고, 데이터는 학습과 예측의 근거가 되며, 알고리즘은 판단과 실행의 논리를 설계한다. 세 요소 모두가 갖춰질 때 비로소 국가 단위의 AI 전략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 축 위에서 미중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컴퓨팅에서 미국은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고성능 GPU의 대중국 수출을 차단하며 중국의 훈련 능력을 제어하고 있고,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하지만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의 기술 자립 속도는 예상을 웃돈다. 2023년 말, 7 나노 반도체 칩의 국산화는 그 신호탄이었다. 미국의 제재는 기술의 시간을 늦출 수 있지만, 생명력 자체를 막지는 못한다.
데이터에서 중국은 압도적 우위에 있다. 13억 인구의 실시간 정보는 그 자체로 AI 모델의 ‘금광’이며, 얼굴 인식 기반의 공공 감시 시스템은 이미 사회 전반에 내재화되어 있다. 도시 전체가 데이터 생성 기계가 된 이 구조 안에서 AI는 하나의 ‘감시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인간이 기술을 쓰는 시대를 지나, 기술이 인간을 관찰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술은 늘 먼저 도달한다, 그 뒤를 윤리가 따라잡기엔 너무 늦다.
알고리즘은 여전히 미국의 손에 있다. OpenAI, Google, Anthropic 같은 기업들이 대규모 언어모델을 통해 기술 리더십을 공고히 하고 있고, 다양한 영역에서 생성 AI의 표준을 선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알고리즘을 만드는 손들 중 상당수가 중국계라는 사실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AI 산업은 인재 기반에서 글로벌하지만, 정책 기반에서는 점점 폐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뇌는 미국에 있지만, 세포는 아시아에 있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트럼프 정부 시절 시행된 ‘차이나 이니셔티브’는 이 인재 구조에 대한 전략적 불안을 반영한다. 과학자의 국적이 안보의 변수로 간주되는 현실은, 기술이 더 이상 산업이 아니라 ‘국방 자산’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이든 정부는 이를 폐지했지만, 최근 다시 유사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전쟁은 더 이상 무기 창고가 아닌 연구소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다. 코드 한 줄이 총알보다 무겁다.
이런 흐름 속에서 미국은 과감한 정책 전환을 선택했다. 양적완화가 아닌 ‘과잉재정’을 통해, 반도체·배터리·전기차 같은 전략 산업에 직접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던 시대에서, 정부가 직접 돈을 빌려 기업에 무장 자금을 지원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산업은 더 이상 시장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국가가 개입하고, 전략이 이끈다.
과잉재정의 효과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양적완화가 인플레이션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면, 과잉재정은 고금리, 고부채, 투자 왜곡이라는 복합적 리스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은 그럼에도 이 전략을 멈추지 않는다. 기술 패권은 단기적 수익이 아닌, 장기적 생존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돈은 가치보다 방향을 위해 존재한다.
한국은 이 전선 위에 놓여 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 전지 등 주요 산업은 미국과 공급망을 공유하면서도 중국 시장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선택은 곧 리스크다. 한쪽을 강화하면, 다른 쪽이 흔들리고, 애매하게 머무르면 모두에게 신뢰를 잃는다. 기술 전쟁의 중심에서, 우리는 가장 민감한 균형을 감당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싱가포르 총리의 선언이 유의미하게 들린다. “우리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싱가포르만의 길을 가겠다.” 짧지만 명확한 이 문장은 중소 국가의 전략 언어이자, 생존의 문장이다. 한국 역시 지금의 산업 구조와 외교 전략을 넘어, 기술 설계 국가로 전환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방향 없는 균형은 부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질문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다. 기술 주권을 말하면서도, 산업 전략은 여전히 부처 단위로 쪼개져 있고, 민관 협력은 선언으로만 머물고 있다. 각각의 산업은 빛나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설계 없는 경쟁력은 우연이고, 전략 없는 기술은 반복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해답보다 ‘어떻게 물을 것인가’의 감각이다.
AI는 인간의 언어를 모방하지만, 인간의 침묵을 복제하지는 못한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한 문장의 여백 속에 담긴 망설임과 그리움을 읽지 못한다면, 인간은 여전히 가장 예민한 존재로 남는다. 우리가 기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술이 감지하지 못하는 결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감각은 가장 느리지만, 가장 멀리 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감각이다. 흐름을 예측하는 알고리즘보다, 바람을 먼저 느끼는 마음이 필요하다. 데이터가 미래를 말해도, 예감이 먼저 움직이는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AI가 모든 것을 분석해도, 결국 움직이는 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오늘 어떤 문장을 쓰고, 어떤 질문을 남길 것인가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