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진 Apr 23. 2018

04. 취준생 진진

지금 꺼내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4월 10일부로 대학병원을 사직하였습니다.
신규 간호사로서 정말 잘해내고 싶던 마음에 글쓰기도 미루고, 
악착같이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썼지만 제가 그리는 미래는 
이 곳의 무늬와 색감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4년 동안 어른들의 말을 듣고 빅 5병원에 대한 환상을 가졌었습니다.
서둘러 취업을 해야 한다는 세상의 압박이나 제 자신도 알아채지 못했던 오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큰 병원이 좋은 병원이 되어줄 거라 믿고 이 곳에 들어왔어요.

하지만 치뤄야 할 댓가는 단순히 사회 초년생이나 신규라는 말로 덮어놓기에는
너무도 쓰고 비릿하고 괴로웠습니다.
신규이기 때문에 당연히 혼을 나고, 신경을 곤두세워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의료계 전반의 문화는 이미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리 겁낼 것도 의아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환자를 돌보는 것 외적으로 불필요하게 인내해야 할 사건들이 이 곳에는 너무 많았고,
건강하고 인간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할 의료진들이 바쁜 일상에 치여 부끄러운 행태를 보이는 모습들이
저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단순히 임상 경력이 있어야 하고, 큰 병원이 연봉을 많이 준다는 이유만으로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제 젊음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기회비용이 될 것 같아
영혼이 죽은 채로 흐르는 시간을 더는 멈추고자 사직을 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이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은 어떤 것인지, 나는 어떤 셋팅 속에서 
더욱 행복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인지, 늦었지만 이제라도 찾아보고 넘어지고 실패하려 합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간호라는 일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간호와 간호사로서의 생활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많이 깨달았지만, 
훗날 먼 길을 돌아와 다시 걷는 이 길과,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주어진대로 걷기만 하는 이 길은 
그 깊이와 굽이만큼이나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거라 믿어요.


더불어 지금 간호학과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른들이나 교수님들 말만 듣고 무조건 큰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자신을 괴롭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실습을 하면서 내가 어떤 간호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인지, 어떤 모습 속에서 
내 정체성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사람인지, 시간이 있을 때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그게 대형병원이라면 다양한 질환의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얼마든지 전진할 이유가 되는 것이겠고, 
자신은 소규모 병원이나 혹은 꼭 병원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싶으면 
그 안에서 처음 꿈꿨던 그 미래를 현실에서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면 되어요.

(대학병원의 고충들을 많이 이야기했지만 어찌되었건 제가 그 곳에서 '부적응자' 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제 말에 큰 의미를 두진 마세요. 아직도 신념과 의지를 갖고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는 동기들과 멋진 프로페셔널리즘을 보여주시는 선배 간호사 선생님들을 저는 또한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제 이야기를 판단의 준거로 삼기 보다는 진로를 넘어서 직장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해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무쪼록 저는 당분간 사회의 충실한 모범생이었던 정체성을 내려놓고
자유에 숨어 백수생활을 합리화 하는 진짜 이십대 취준생이 되어보려 합니다.

신규 간호사, 우리 모두에게 
출근할 이유가 있는 내일이 찾아온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이 언제올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여전히 살리는 일기를 쓰고 있을 것 같아요 : )

매거진의 이전글 03. 예민해도 괜찮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