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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Apr 30. 2018

05. 다시 간호사, 그래도 간호사

아픔이 어둠이라면 살린다는 것은 빛일 수도 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매일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자처한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너그럽게 감내하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했었지만
누군가의 선택을 받고자 다시 경쟁 속에 뛰어드는 일도 인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공기업, 간호직 공무원, 검진센터, 의학뉴스 취재기자. 찾아보지 않은 곳이 없다. 어떤 곳은 쉽게 연락이 오기도 했고 가끔은 무한히 열린 길이 가슴 설레기도 했다.

그래도 이십대의 건장한 체력을 가진 청춘이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침대를 바라보고 있는 일은 가혹하고 슬픈 일이다. 머물 곳을 찾기 위해선 수치스러울 만큼의 간절함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회. 몇 없는 좌석에 앉기 위해 우리는 취약한 내면을 감춰야 한다. 다들 깊고 검은 속을 하고 어쩔 수 없다며 아프게 웃는다.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어쩌면 시작조차 할 수 없으리라는 지각. 나보다 앞서서 방황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매 순간 연정의 대상이었다. 경의를 표하지 않은 얼굴들이 없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내가 4년 동안 대학을 다니며 깨치고 배운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졸업식에서 지도 교수님이 은색 뱃지를 달아주실 때, 우리는 왜 그토록 울컥하는 감정에 목이 메었나. 지금보다 네 살이나 어렸던 입학식에서의 나와, 조금씩 자라난, 수많은 날의 '진진'들을 스쳐온다. 그리고 곧 깨닫는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실습했던 시간들의 끝에는 활자가 아니라 감촉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같은 포유류로서의 인간에 대한 감촉.  그 피부로 느껴졌던 연민들. 마르고 거친 살결. 소실된 근육. 가쁘고 거친 숨결. 미약하나마 들려오는 혈관의 박동.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는 그 이상한 진실의 세계.  환자가 된 사람들의 손을 잡으면 찰나의 느낌만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었다. 그 심성에 사로잡혀 본 사람은 안다. 겸허하며 굳세어지는 마음. 그걸 못 잊겠어서, 나는 다시 간호사, 그래도 간호사, 라고 혼잣말을 한다.




꽤 오랜만에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 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흔해빠진 독서, 기형도



간호사는 전사로 비유되곤 하지만, 그동안 줄곧 깨우친 바로 우리는 죽음과 싸운다기보다 죽음에게 자비를 구하는 자에 가깝다. 모든 사람들은 죽고, 병을 치유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그 병에 걸리거나 죽는다. 죽음이란 싸울 대상이 아니라 헤아리고 응시해가는 과정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고통이 올 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일 또한 인생의 강인한 자세 중의 하나 같다. 끝까지 발버둥치고 원망하며 죽음에 이르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까. 잘은 모르지만, 내가  변변치 않은 시간 속에서 뜻을 품고 내린 결론은 그렇다.  질병과 고통은 형벌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일. 스스로를 자책하고 과거에 괴로워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 간호사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숨 쉬며 이왕이면 멋지게 해내기에 좋은 일.



일요일 봄 밤에는 원하는 직장의 기준을 세웠다.
첫번째, 글을 쓰는 데 지장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 중에서도 생각하고, 기록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남겨두어야 한다. 저번처럼 지쳐서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출퇴근하기 급급하다 보면 영혼이 죽는 느낌이 들어 무척이나 괴롭다. 임상 공부를 하면서도 일기 쓰기를 게을리 하고 싶지 않다. 병상 수가 많거나 오버 타임이 심하거나, 중증도가 높은 환경은 저번처럼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모가 심할 것 같아 우선 대형 병원과 규모가 큰 3차 병원은 걸렀다.

두번째, 돈은 4년제를 졸업한 대다수 청년들의 평균 연봉 수준이면 된다. 그래도 고생하신 부모님께 조금은 짐을 덜어드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 지금 머물고 있는 집 전세금도 두 분이름으로 대출이 되어 있다. 잘 버는 자식은 아니더라도 생활에 허덕이는 자식은 아니라면 좋겠다. 그런 면모는 보여드리고 싶지 않다.

마지막 세번째,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스물 한 살 때, 성년의 날을 맞으면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일이 있다. 세상에 해가 없는 어른이 되는 것. 막연하게 나마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은 비록 그때만큼 순수하지는 않지만, 살다 보니 아이들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힘이 더 큰 보답으로 돌아와 나를 지켜주었던 때가 많았다. 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했을 때도 그랬고, 열 살 아래의 남동생이 옹알이하다 훌쩍 자라는 모습을 볼 때도 그랬다. 그 친구들이 주는 에너지라면, 힘들고 거친 병원일도 조금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3교대도, 불면증도, 새로 만날 그곳의 사람들도 무섭고 불안하지만 나는 이 아이들로 인해 '제발 내가 버텼으면, 이번에는 제발 지지 않았으면'하고 기도한다.

덧붙이자면 지역아동센터는 사회복지사를 많이 뽑던데, 자격증을 따거나 어떻게든 지원해서 들어갈까 하는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효율이라는 게 있고,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는 것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있는 간호사 면허와 경험을 활용하기로 했다. 자원의 효율성 같은 걸 괜히 배우지는 않았구나 겁이 없는 척 농담도 해본다. 이 결정이 부디 세상에도 이롭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새로운 이력서를 쓰는 날이다.
결론적으로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1차 병원 수준의 아동 전문 병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몇 주 동안, 나름 유리창을 끼웠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고, 뙤약볕도 막아주지 못하고, 아직은 쉽게 금이 가는 취약성을 가졌지만,
공이 오면 그래도 한 번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유리창.
저번처럼 곧바로 나를 무너뜨리게 놔두지는 않을 한 겹의 유리창.
그래서 가 본다. '제발 내가 버텼으면, 이번에는 제발 우리가 지지 않았으면'하고.
아직 맨 몸인 모두와 유리창을 장전한 모두에게 건승을 빈다.
나는 다시, 신규가 되는 걸까? 그래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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