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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Sep 29. 2020

11. 이상한 세상이지만, 너도 사랑받아야지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 대한 감상


대학교수들끼리 사담을 나누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번에 우리 학교에 아프리카 학생이 와서 머리가 아파요.”


“왜요?”


“국가고시 합격률이 100%여야 하는데, 그 친구 때문에 문제 생기면 어떡해요. 한국말도 잘 모른대요.”


“큰일이네요. 한국엔 왜 왔대요?”


“자기 나라에 뭘 배워가고 싶다나 봐요. 걔 내쫓으려고 이번에 시험 문제도 어렵게 냈어요. ”


“자기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데, 그렇죠?”





한낱 어린 직원인 나는 아무 관심이 없는 척 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유명 대학과 병원 이름을 내걸고 앉아 있던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믿었던 걸까?





물론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학생도, 교수의 평소 인품도, 학교의 사정도 그 대화만으로는 미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만은 너무도 선명했다.


환하게 웃으며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는 저분들이 너무 이상해 보였다.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의 안부가 자꾸만 궁금하고 마음 쓰였다.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드라마를 기사로 접했을 때는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다.


첫 번째 이유는 ‘82년생 김지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배우가 같아서도 그렇겠지만, 구체적인 사람 이름을 딴 제목이라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작품을 꽤 좋아했지만, 사람들이 ‘김지영 파’, ‘반 김지영 파’를 나눠 싸우는 것은 싫었다.


또 다른 이유는 취향 차이였다. ‘젤리’ 같은 환상적인 소재를 선호하지 않을뿐더러, 어렴풋이 풍기는 로맨스 장르가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시즌 1을 감상한 후,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이유는 순전히 나의 편견이고 기우였다.


오히려 문제는 나의 짧은 식견이었다.


드라마의 줄거리를 따라가기 쉽지 않아서 이해보다는 추측 수준에 만족하고 넘어가야 했다.


캐릭터들의 행위 의도를 선명히 파악하기 힘들었고, 대화도 은유나 상징적인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시즌 4회쯤이었을까?


이 모든 장치가 저마다의 상처를 따뜻한 촉감으로 품어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는 아이들의 갑갑함.


선생님이 되었지만, 여전히 인생에는 눈이 어두운 어른들의 무지함.


어른보다 더 어른다운 기운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해 나가는 아이들의 담담함.





날카롭고 악독한 세상사 앞에, 이 드라마는 투명하고 말랑거리는 마음을 내어준다.





죽음, 영혼, 추모라는 단어들은 이제는 너무 많아서 칙칙하다.


그것이 아프고 슬프지만, 위로보다는 적응을 선택하는 것 역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안은영이 보는 젤리는 세상의 많은 불편함을 그녀만의 다정한 시각으로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고통을 회피하면서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안은영은 계속해서 고통을 찾아본다.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묻고, 보이는 것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해준다.






그리고 생각한다. 젤리는 욕망의 흔적이라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젤리를 만들고, 때로는 죽고 나서도 젤리는 머문다고.


그것이 세상에 해가 되지 않도록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쏘는 것이 안은영이 감내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 노력의 끝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진실뿐이다.


안은영은 힘들 때마다 ‘씨발’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데, 그 발랄한 타이밍이 나에겐 휴식 같았다.


사회는 영웅에게 완벽함을 넘어 신에 가까운 인간성을 요구하지만,


실제로 영원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처음부터 왜 영웅은 오롯이 혼자만 고군분투를 해야 하는지, 그것부터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닌가.






안은영의 ‘씨발’에는 하기 싫으면서도 해야 하는 희생이 있다.


직장을 지겨워하고 크게 사명감도 없지만 갈 곳이 없어 그저 그곳에 머무르는 평범한 우리의 희생.


미디어에서 다루는 어떤 영웅들의 발언보다 멋있었고, 더 고마웠다.





아직 드라마의 전체 의도를 다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이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너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렴.


세상이 너에게 이상하다고 비웃거나 겁을 준다고 해서 도망치거나 숨을 필요가 없단다.





영원히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며 학교를 지키는 혜민이가 그렇고,


고결하게 살아가려다 크레인에 깔려 삶을 마감한 강선이가 그렇고,


유치원을 떠나지 못하는 나이 든 영혼 정현이가 그렇다.







그리고 사람들을 살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고 힘들어하는 안은영이 있다.





모두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았을 뿐 누가 이들을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건교사 안은영’은 계속해서 묻고, 보이는 대로 말해준다.


이상한 세상이지만, 너도 사랑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우리만의 말랑거리는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시즌 2가 나온다면, 안은영은 더 깊숙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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