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을 취소한다고?
글쓰기를 통해 마음에 빈자리를 채워나간다는 것은 글작가들의 공통된 이치일 것이다. 요즘은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많아 브런치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글쓰기도 좋지만 나를 향한 관심이 부족한 세태가 낳은 기현상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분명 사람들은 많지만, 젊은이들은 줄어가고 남겨진 기성세대들은 점점 외로워져 간다.
지금부터 펼쳐놓을 고민이 바로 이 외로움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순항훈련을 마치고 진해 모 부대에 배정을 받았는데, 알려지지 않은 낯선 직책이었다. 전역하는 자원이어서 내 의지와 관계없는 곳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일 년 동안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전역 후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이렇게 총 5년을 복무하고 대위로 전역해서 새 출발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를 만났다. 이 분은 만난 지 3개월여 만에 '결혼'이란 단어를 꺼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고민을 해야 했다. 당장 결혼할 수 있는가. 전역 후에 바로 직장을 찾을 수 있는가. 내가 하려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앞서 소개된 바와 같이 전역 후에 내 목표는 대학원 진학, 대학원에서 소양을 쌓고 긴 호흡으로 직장을 찾아야겠단 생각이 있었다. 조금 다르게 보면, 여기서 더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심지어 월급도 없이 말이다. 이 와중에 결혼을 언급하는 여자친구를 만났다.
불투명한 미래와 엄습하는 고독 속으로 스스로 들어갈 것인가. 한 번도 고민해보지 못했던 결혼이라는 글자 앞에 설 것인가. 바닷가라 자주 생겼던 자욱한 해무 속에 있는 듯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희뿌연 공기, 축축하고 어두운 방에 숨은 햄스터 같은 신세였다.
가는 인연 잡지 말고, 오는 인연 막지 말라고 했다. 여자친구에게 1년간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동안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렇다. 다시 '복무연장'을 선택했다. 총 3번의 복무연장. 어느새 3년이면 끝날 일을 6년이나 하게 됐다. 그것도 군 복무를. 한편으로는 여기서 인연을 놓치면 나중에 어떤 인연이 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불안정한 직장에, 집안은 무너져버린 상태여서 갈 길이 구만리였던 나를, 일 년 동안 잠자코 기다리면서 지켜봐 주었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썩 괜찮은 일을 해왔단 생각도 들었다. 물론 현실에 부닥쳐버린 나약한 중생의 합리화일 수 있겠으나, 따지고 보면 내 꿈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사람을 돕는 삶. 사실 이런 추상적인 말은 어디에든 갖다 붙이기 나름이기는 하나, 나에겐 삶의 방향을 잡는 길잡이별이기도 하다. 나는 보급장교로서 해군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는, 이미 '돕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함정에 필요한 연료를 채우고, 대원들의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던 일들이 모두 해군이란 함정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더불어 그 일에 소홀한 적도 없었다.
나는 어느덧 7년 차 장교였고, 주로 3년 아래 저연차 장교들이 대상이 되는 장기복무 선발에 합격할 거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전역지원서를 냈다가 전역 취소 신청서를 내고 장기복무 신청을 했다. 그렇기에 날 바라보는 시선이 결코 좋지 않았다. 그런 나를 당시 부대 지휘관께서 응원해 주셨다.
"너 같은 장교가 해군에 오래 남아야지."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했다. 7년 차 장교에게 해군 인력의 문은 아주 단단히 잠겨있었지만,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가정을 선물해 주시려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잔잔했던 바다가 드높은 해일에 뒤집어지듯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우뚝 섰다. 한때 극심한 고통을 주었던 군 생활이 계속 이어진다는 불안이 있었지만, 발표가 났던 그 해 겨울 나는 연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을 예약했다. 이어서 해군 장교답게 바다의 방패라 불리는 이지스함에 올라, 당당한 마음으로 우리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