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을 읽고
"학창시절부터 개인적으로 좋아했고 존경할만한 삶의 궤적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는 선배의 페북 서평을 보고 서점에서 사서 연휴기간 눈깜짝할만 시간에 읽어낸 최근 10년간 가장 괴로웠던(?) 책"
2017년 첫 독서로 선택한 민음사에서 나온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난 개인적인 단상이다.
별 생각 없이 시작된 독서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썩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의 '해리 현상'을 포함한 초반 1/3까지는 뭔가 별스러운 전투적 페미니스트가 쓴, 소설을 가장한 '격문'을 읽는 듯 했고, 다음 미즈넷류의 며느리들의 시댁, 남편 디스가 연상되었으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는 주인공의 삶의 길목에서 마주친 다양한 차별의 에피소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등장하여 차마 괴로워 다음 장을 넘기기 앞서 머뭇거리기를 수차례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1남 1녀 집안의 장남으로 필연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소외되는데 무의식적으로 일조하였으며, 와이프로 하여금 비자발적 시집살이를 하게끔 만든 40대 한국 남성으로 이책 곳곳에서 표현되는 이 사회의 '성차별'에 나 또한 방조자이거나 적극적 동조자였을 수도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불편한 경험이었다.
나 스스로 이만하면 gender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다고 생각해 왔으며 양성평등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리버럴하다고 생각해 왔으나, 책 속에 묘사된 생생한 에피소드에 스스로를 투영해 보면서 지금까지의 어줍쟎은 자기확신이 어찌보면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도 부끄러웠다. 특히, 결혼적령기의 여성 부하직원들에게 나름의 충고라고 지껄여온 말들이 얼마나 되먹지 않은 '요설'에 불과하였는가... 손발이 오그라들고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이 들기를 수차례.. 번개가 번쩍하는 시간이 지나 책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습관적으로 모름지기 책이란 읽고난 후 뭔가 되새길 '교훈'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으나, 이 책은 그저 3~4시간을 들여 책속의 에피소드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야말로 '충분'하였다. 아마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대한민국 남자라면...
30대 이상의 남성이라면, 특히 딸을 가진 남성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불편함을 감수할 굳은 각오를 하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아프고 불편하다면 글쓴이의 글재주를 칭찬하기에 앞서 있는 '현실' 그 자체의 문제점을 공감하는 것이 가장 성의있는 책읽기라고 믿는다.
와이프에게 읽어보라고 했는데, 며칠 후 책 내용에 대한 적극적 동조와 함께 나에게 날아올 힐난을 각오하고 있다, 다만 중3 올라가는 딸에게는 차마 읽혀볼 엄두가 안 난다. 현실에 미리 실망할까봐... 그리고 아빠는 세상이 이 모양이 되도록 뭘 했는냐는 질문에 적당히 둘러댈 핑계가 없을 듯 하여...
제대로 보지도 않고 PC에 틀어놓고 시간만 때우는 직장 내 성희롱, 성평등 비디오 교육 때려치고 이 책 한권씩 읽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