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아저씨가 ‘참 쉽죠?’하고 그린 풍경화는 전부 실화였다.
호스텔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밤새 푹 잤다. 유럽 여행 때 갔던 호스텔은 새벽까지 여행자들이랑 술 마시면서 시끄럽게 놀았는데, 천혜의 자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 그런가? 사람 간의 사교보다는 고요함을 즐기려는 것 같았다.
고여사는 오늘도 일찍 일어나 공책에 여행경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역시 대단한 우리 고여사님. 방 바로 앞에 있는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드디어 재스퍼의 상큼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엄마, 우리 공용 부엌 가서 아침 먹자."
고여사의 주황색 캐리어에서 맥심 커피믹스와 어제 편의점에서 산 빵을 꺼냈다. 부실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장거리 운전에다 마약상 때문에 덜덜 떨려서 장 보러 갈 정신이 없었다.
공용 부엌은 깔끔했다. 인덕션, 전자레인지, 토스터, 프라이팬, 커피포트 등 웬만한 기구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빵을 2조각으로 나누고 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호로록 마셨다. 옆 테이블에 동양계 중년 부부 두 쌍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딸, 저쪽에 한국 사람들 같지 않아?"
"응 왠지 그런 거 같애."
그때였다. 그중 한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한국 분이세요?"
"어머,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맥심 커피 보고 알았죠. 한국 사람은 맥심 아닙니까."
"아 그렇죠! 다 같이 캐나다 여행 중이세요?"
"네, 어제 도착했어요. 우리는 미국에 이민 가서 텍사스에 살아요. 근데... 혹시 괜찮으면 우리가 음식 좀 나눠줄까요? 어젯밤에 마트에서 장을 봐서 이것저것 많아요."
"아 정말요? 저희 어제 늦게 도착해서 먹을 게 없었어요. 나눠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그럼요. 이거 드세요."
아저씨는 우리에게 요거트, 식빵, 잼, 버터, 과일을 주었다. 우와. 우리의 빈약한 아침은 어느새 성대한 조찬이 되었다. 우리는 보답으로 커피믹스 노란 거 4봉을 건넸다. 이로써, 많이 기울어진 물물교환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미국에서는 뭐 하세요?”
“저는 목사예요.”
“아 그렇군요! 역시 배고픈 어린양들을 그냥 못 지나치신 건 목사님이라 그러신 거네요.”
“하하 무슨 말씀을. 한국 사람끼리 타지에서 나눠먹고 챙겨주고 그래야죠.”
“맞아요. 안 그래도 어제 하루종일 제대로 못 먹어서 기운 없었는데 이거 먹으니 힘이 나네요. 여행할 에너지를 다 얻은 것 같아요.”
“잘 됐네요. 많이 드세요.”
고여사와 나는 그 분들이 식사를 다 마치고 떠난 후에도 한참을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오늘부턴 장거리 운전 부담없이 구경만 슬슬 다니면 되니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배를 채우고 든든한 맘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재스퍼에서의 첫 목적지는 Maligne Canyon Trail. 호스텔에서 10km 정도 달려 도착했다. 재스퍼에서는 어딜 가든 주차가 편해서 좋았다. 주차장도 한산하고. 어쩌면 로키산맥의 다른 관광지들보다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덕분에 우리는 교통/주차 대란 없이 편하게 이동해서 차 대고 구경을 다녔다.
멀린 캐년은 4.4km의 부담 없는 길이에 중급 정도의 난이도였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중간에 쉬지 않고 걸었다. 경치가 예쁘긴 했지만, 가을이 저물어가는 시기의 침엽수림은 좀 칙칙했다. 초록도 아니고 붉은빛도 아닌 뭔가 좀... 누런? 여름에 훨씬 멋졌을 것 같다. 단풍 보려고 시기 맞춰서 온 건데 단풍도 없고 초록초록하지도 않고. 떼잉.
그래도 꼭대기에서 보는 경치는 정말 멋졌다. 아무렴, 로키산맥인데 어느 계절이든 기본은 하겠지. 저 멀리 눈 쌓인 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뾰족 나무들이 빽빽했다.
이 풍경, 왠지 익숙했다. 바로 어릴 때 보던 <그림을 그립시다>의 '참 쉽죠?' 밥 아저씨의 그림과 싱크로율 99.99%였다. 밥 아저씨는 분명 캐나다 사람이렷다.(찾아보니 밥 아저씨는 미국 플로리다 출신이라고 한다. 충격!)
"엄마, 다음에 여기 올 땐 꼭 여름에 오자."
"그래 여름에 한 번 더 와."
누가 들으면 '돈 많아서 해외여행을 수시로 다니나 봐' 하겠지만, 우리는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린 몽상가적 기질과 여차하면 해버리는 행동력이 있으므로, 가능성 낮은 일도 반드시 할 것처럼 믿어버리고 가끔 진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그렇게 순간의 아쉬움을 달래고 나중을 기약한다.
뭐, 진짜로 다시 올 수도 있지. 캐나다를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멀린캐년을 다 돌고 우리는 근처의 Annette Lake로 향했다. 재스퍼에는 꼭 가봐야 할 트레킹 코스와 호수가 수십 개는 되었다. 2박 3일 동안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에, 고심 끝에 선별한 호수가 바로 아네트 호수였다. 이곳이 규모는 작아도 그렇게 색이 아름답다고 했다.
"와, 물 색깔 봐! 어쩜 이렇게 영롱하지?"
호수는 완전한 에메랄드 색이었다. 수영장 바닥에 색깔 타일 깐 것도 아니고, 이런 색이 자연적으로 가능하다고? 믿기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호수에 발을 담가보고 싶었다. 색이 너무 예뻤고, 얼마나 차가운 지도 궁금했다.
"나 물에 발 담가볼래!"
"아이구 추워~ 감기 걸려!"
어렸을 때부터 고여사는 내가 밖에서 양말을 벗거나 겨울에 목이 훤히 나와 있으면 늘 "추워~ 감기 걸려!"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말 안 듣는 어린이였는데 지금이라고 들을 리 없다. 양말을 벗어 신발에 넣고 두 발을 살며시 집어넣었다. 결과는...?!
웬만해선 10초는 버텨보려고 했는데 발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즉시 포기했다. 얼지도 않았는데 물이 왜 얼음보다 차갑지?
고여사가 곁에 앉더니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응? 엄마도 발 담그게?"
"응 나도 담가볼래."
두 번째 담갔을 때도 역시나 발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번엔 10초 정도 버텼다(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고여사랑 나란히 앉아 같은 감각을 동시에 느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두 군데를 느긋이 구경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짐을 놓자마자 장을 보러 나갔다. 숙소 근처에 하나로마트 정도 되는 로컬 마트가 있었다. 외국에서 마트 구경하는 것만큼 재밌는 게 또 없지. 우리는 한참 둘러보다가 저녁에 먹을 안심 스테이크와 아침에 먹을 몇 가지 음식을 샀다. 고여사가 맛있는 뭔가를 만들어주길 바라며.
고여사의 스테이크는 웰던, 나는 미디엄 웰던. 역시 서양 소가 싸고 맛있어. 치즈도 맛있고 블랙베리도 크고 달았다. 고여사도 나도 행복해하며 저녁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엄마가 술을 안 마셔서 그렇지, 와인 곁들였으면 딱이었을 것 같은데. 속으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재스퍼에서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