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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tabook Nov 27. 2022

에메랄드빛 호수를 본 적 있나요?_재스퍼(2)

밥 아저씨가 ‘참 쉽죠?’하고 그린 풍경화는 전부 실화였다.

호스텔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밤새 푹 잤다. 유럽 여행 때 갔던 호스텔은 새벽까지 여행자들이랑 술 마시면서 시끄럽게 놀았는데, 천혜의 자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 그런가? 사람 간의 사교보다는 고요함을 즐기려는 것 같았다.


고여사는 오늘도 일찍 일어나 공책에 여행경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역시 대단한 우리 고여사님. 방 바로 앞에 있는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드디어 재스퍼의 상큼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엄마, 우리 공용 부엌 가서 아침 먹자."


고여사의 주황색 캐리어에서 맥심 커피믹스와 어제 편의점에서 산 빵을 꺼냈다. 부실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장거리 운전에다 마약상 때문에 덜덜 떨려서 장 보러 갈 정신이 없었다.


공용 부엌은 깔끔했다. 인덕션, 전자레인지, 토스터, 프라이팬, 커피포트 등 웬만한 기구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빵을 2조각으로 나누고 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호로록 마셨다. 옆 테이블에 동양계 중년 부부 두 쌍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딸, 저쪽에 한국 사람들 같지 않아?"


"응 왠지 그런 거 같애."


그때였다. 그중 한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한국 분이세요?"


"어머,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맥심 커피 보고 알았죠. 한국 사람은 맥심 아닙니까."


"아 그렇죠! 다 같이 캐나다 여행 중이세요?"


"네, 어제 도착했어요. 우리는 미국에 이민 가서 텍사스에 살아요. 근데... 혹시 괜찮으면 우리가 음식 좀 나눠줄까요? 어젯밤에 마트에서 장을 봐서 이것저것 많아요."


"아 정말요? 저희 어제 늦게 도착해서 먹을 게 없었어요. 나눠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그럼요. 이거 드세요."


아저씨는 우리에게 요거트, 식빵, 잼, 버터, 과일을 주었다. 우와. 우리의 빈약한 아침은 어느새 성대한 조찬이 되었다. 우리는 보답으로 커피믹스 노란 거 4봉을 건넸다. 이로써, 많이 기울어진 물물교환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미국에서는  하세요?”


저는 목사예요.”


 그렇군요! 역시 배고픈 어린양들을 그냥 못 지나치신 건 목사님이라 그러신 거네요.


하하 무슨 말씀을. 한국 사람끼리 타지에서 나눠먹고 챙겨주고 그래야죠.”


맞아요.  그래도 어제 하루종일 제대로  먹어서 기운 없었는데 이거 먹으니 힘이 나네요. 여행할 에너지를  얻은  같아요.”


 됐네요. 많이 드세요.”


고여사와 나는  분들이 식사를  마치고 떠난 후에도 한참을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오늘부턴 장거리 운전 부담없이 구경만 슬슬 다니면 되니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배를 채우고 든든한 맘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재스퍼에서의  목적지는 Maligne Canyon Trail. 호스텔에서 10km 정도 달려 도착했다. 재스퍼에서는 어딜 가든 주차가 편해서 좋았다. 주차장도 한산하고. 어쩌면 로키산맥의 다른 관광지들보다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덕분에 우리는 교통/주차 대란 없이 편하게 이동해서  대고 구경을 다녔다.


멀린 캐년은 4.4km의 부담 없는 길이에 중급 정도의 난이도였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중간에 쉬지 않고 걸었다. 경치가 예쁘긴 했지만, 가을이 저물어가는 시기의 침엽수림은 좀 칙칙했다. 초록도 아니고 붉은빛도 아닌 뭔가 좀... 누런? 여름에 훨씬 멋졌을 것 같다. 단풍 보려고 시기 맞춰서 온 건데 단풍도 없고 초록초록하지도 않고. 떼잉.


그래도 꼭대기에서 보는 경치는 정말 멋졌다. 아무렴, 로키산맥인데 어느 계절이든 기본은 하겠지. 저 멀리 눈 쌓인 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뾰족 나무들이 빽빽했다.


이 풍경, 왠지 익숙했다. 바로 어릴 때 보던 <그림을 그립시다>의 '참 쉽죠?' 밥 아저씨의 그림과 싱크로율 99.99%였다. 밥 아저씨는 분명 캐나다 사람이렷다.(찾아보니 밥 아저씨는 미국 플로리다 출신이라고 한다. 충격!)


색감은 조금 아쉬워도 실제로 보면 분명히 멋진 풍경이다

"엄마, 다음에 여기 올 땐 꼭 여름에 오자."


"그래 여름에 한 번 더 와."


누가 들으면 '돈 많아서 해외여행을 수시로 다니나 봐' 하겠지만, 우리는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린 몽상가적 기질과 여차하면 해버리는 행동력이 있으므로, 가능성 낮은 일도 반드시 할 것처럼 믿어버리고 가끔 진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그렇게 순간의 아쉬움을 달래고 나중을 기약한다.

뭐, 진짜로 다시 올 수도 있지. 캐나다를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멀린캐년을 다 돌고 우리는 근처의 Annette Lake로 향했다. 재스퍼에는 꼭 가봐야 할 트레킹 코스와 호수가 수십 개는 되었다. 2박 3일 동안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에, 고심 끝에 선별한 호수가 바로 아네트 호수였다. 이곳이 규모는 작아도 그렇게 색이 아름답다고 했다.


"와, 물 색깔 봐! 어쩜 이렇게 영롱하지?"



호수는 완전한 에메랄드 색이었다. 수영장 바닥에 색깔 타일 깐 것도 아니고, 이런 색이 자연적으로 가능하다고? 믿기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호수에 발을 담가보고 싶었다. 색이 너무 예뻤고, 얼마나 차가운 지도 궁금했다.


"나 물에 발 담가볼래!"


"아이구 추워~ 감기 걸려!"


어렸을 때부터 고여사는 내가 밖에서 양말을 벗거나 겨울에 목이 훤히 나와 있으면 늘 "추워~ 감기 걸려!"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말 안 듣는 어린이였는데 지금이라고 들을 리 없다. 양말을 벗어 신발에 넣고 두 발을 살며시 집어넣었다. 결과는...?!



웬만해선 10초는 버텨보려고 했는데 발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즉시 포기했다. 얼지도 않았는데 물이 왜 얼음보다 차갑지?


고여사가 곁에 앉더니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응? 엄마도 발 담그게?"


"응 나도 담가볼래."

무서워하지 마세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발입니다.


두 번째 담갔을 때도 역시나 발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번엔 10초 정도 버텼다(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고여사랑 나란히 앉아 같은 감각을 동시에 느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두 군데를 느긋이 구경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짐을 놓자마자 장을 보러 나갔다. 숙소 근처에 하나로마트 정도 되는 로컬 마트가 있었다. 외국에서 마트 구경하는 것만큼 재밌는 게 또 없지. 우리는 한참 둘러보다가 저녁에 먹을 안심 스테이크와 아침에 먹을 몇 가지 음식을 샀다. 고여사가 맛있는 뭔가를 만들어주길 바라며.


동영상 찍히는 걸 싫어하는 고여사는, 딸을 위해 많이 참고 있지만 싫은 마음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조촐하지만 든든했던 저녁식사

고여사의 스테이크는 웰던, 나는 미디엄 웰던. 역시 서양 소가 싸고 맛있어. 치즈도 맛있고 블랙베리도 크고 달았다. 고여사도 나도 행복해하며 저녁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엄마가 술을 안 마셔서 그렇지, 와인 곁들였으면 딱이었을 것 같은데. 속으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재스퍼에서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오늘도 씩씩하게 걸어가는 꼬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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