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불장난이 재밌는 거래요
"방 아늑하고 좋다!"
외관은 조금 허름했는데, 방 내부는 넓고 아늑했다. 오렌지빛 조명이 은은해서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엄마, 여기 벽난로 있어! 땔 줄 알아?"
"그럴걸? 예전에 아궁이 지피던 솜씨가 있는데, 식은 죽 먹기지."
어릴 때 외할머니댁에서 아궁이를 때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가마솥에 밥을 했다. 하루는 밥 하시는 할머니 옆에서 아궁이에 땔감을 집어넣다가, 막내 이모 일기장이 땔감 더미에 섞여 있는 걸 보았다. 이모는 일기장을 불태우려고 내놓았겠지? 어린 마음에도 이건 넣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땔감 맨 아래로 옮겨놨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날 일기장은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을 것이다.
"엄마, 우리 나가서 핫텁 가보자.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수영복을 챙겨서 핫텁, 그러니까 노천탕으로 갔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히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으 추워!!"
우리는 덜덜 떨면서 몸을 감싼 수건을 땅에 내려놓고 탕에 들어갔다. 물이 따뜻했다.
"와... 진짜 좋아..."
캐나다에 와서 내내 추웠는데, 뜨끈한 탕에 들어오니 몸이 노곤노곤 풀어지는 것 같았다. 물 묻은 얼굴은 바람이 불어 차가웠고, 물에 담근 몸은 따뜻했다. 천국이 따로 있나, 이게 천국이지. 주위 경치를 보며 고여사와 유유자적 즐겼다.
몇 년 전 겨울, 강원도 인제에 있는 노천 온천에 갔었다. 1월의 눈 내린 풍경을 보며 온천욕을 하는데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싶었다. 고여사랑도 한 번 가야지 했는데, 캐나다 노천탕에 함께 왔네.
한 시간쯤 놀다가 탕에서 나왔다. 샤워하고 나오니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이제 또 뭘 할까 생각하며 숙소 쪽으로 걸었다.
"딸, 우리 라운지 가볼래?"
우리는 숙소로 가던 방향을 돌려 라운지로 향했다. 라운지는 아까 체크인한 건물 2층에 있었다. 계단을 걸어 널찍한 공간에 소파와 벽난로가 있었다. 여행객들이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테이블에서 간단한 안주와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한쪽에 마련된 포켓볼 테이블에서는 백인 커플이 포켓볼을 치고 있었다. 나이는 50대 초반쯤? 부부끼리 여행 와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고여사와 나는 벽난로 앞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포켓볼을 치던 여자가 계속 우리 쪽으로 시선을 주면서, 벽난로 위를 보며 사진을 찍었다.
"거기 뭐가 있나요?"
내가 물었다.
"저기 조그만 박쥐가 있어요."
일어나서 가까이 가보니 정말 아주 작은 박쥐가 벽에 붙어 있었다. 박쥐는 생전 처음 보는데, 저렇게 작은 생물이라니. 너무 귀여웠다.
"박쥐 처음 보는데 귀엽네요. 길을 잃고 들어왔나 봐요."
"그런 것 같아요. 엄마랑 여행 온 건가요?"
"네 오늘까지 재스퍼에 있다가 오늘 에메랄드 레이크에 왔어요. 여행 중이신가요?"
"네, 우리는 캘거리에 사는데 여기에 2주간 휴가를 왔어요."
와 좋겠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쉴 수 있다니. 캘거리에 사니까 가능하겠지? 나도 한국에 있으면 어디 경치 좋은 곳에서 2주씩 쉴 수 있을까? (1년 후, 나는 강릉에 두 달을 머물며 쉬게 된다)
우리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엄마, 우리 저녁 햇반에 라면인가?"
"그러지 뭐. 들어가서 엄마가 라면 끓여줄게.”
"아 라면도 좋긴 한데, 저녁엔 좀 다른 거 먹고 싶다."
"그럼 우리 나가서 먹을래?"
아까 프런트 데스크 옆에 있는 레스토랑이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거기서 저녁을 먹으면 근사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내일부터 3일 내내 캐나다 친구와 같이 다닐 거라 식비를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현지인이랑 돌아다니면 맛집을 많이 갈 수 있으니까 그때 원 없이 먹지 뭐.
"아냐 엄마, 우리 그냥 들어가서 햇반에 라면 먹자."
우리는 방에 들어왔다. 조금 썰렁했다.
"엄마 우리 벽난로 지펴보자."
벽난로 앞에 놓인 안내문에 불 피우는 법이 적혀 있었다. 안내문에 나온 대로 어설프게 하고 있는데, 고여사가 나서서 능숙하게 불을 지폈다. 역시 짬이 있으셔. 불이 순식간에 붙었다. 고여사는 손을 탁탁 털며 뒤로 물러났다.
"원래 불장난이 재밌는 거야."
오 고여사, 위험한 발언?
벽난로 가득 불이 활활 타올랐다. 우리는 저녁을 간단히 먹고 예쁜 찻잔에 차를 내렸다. 차를 홀짝이며 벽난로 앞에 앉아 불멍을 때렸다.
"아~ 나도 벽난로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예전에 친한 언니네 별장에 놀러 가 벽난로를 쬐던 기억이 났다. 3층 높이의 전원주택이었는데, 그날 밤 벽난로 앞에서 맥주를 원 없이 마시고 2층 손님방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창문 밖으로 전나무들이 보였다.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이었다. 나도 언젠간 그런 별장을 가질 수 있을까?
"엄마,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나도 아까 그 커플처럼 2주일씩 이런 곳에서 휴가 보내고 싶어. 돈 걱정 없이. 경치 좋은 곳에 별장도 갖고 싶어."
"그래 한번 해봐. 우리 딸 앞날이 창창한데 할 수도 있지."
고여사는 최고다. '그거 못해. 헛된 꿈 꾸지 말고 현실적으로 살아라'가 아닌, '할 수도 있지'라는 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그리고 고여사는 기분 맞춰주려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도 있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좋았다.
살면서 많은 것이 불가능하다. 캐나다에서 돈 걱정 없이 좋은 경치 보면서 한 달 동안 여행하는 것도, 3층짜리 별장을 갖고 때때로 가서 쉬는 건, 사실 실현 가능성이 아주 낮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 1000년을 생존한다거나, 해가 서쪽에서 뜨게 만드는 정도의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항상 실낱같은 가능성을 꿈꾸며 행복하게 달리게 만드는 게 바로 이런 희망적인 이야기다. 나는 이런 약간은 비현실적인 희망으로 사는 것 같다.
고여사의 반찬과 햇반과 라면이 거의 다 없어지고 있었다. 여행 초반에 무슨 한국 음식을 그렇게 싸왔느냐며 고여사를 구박했는데, 어느새 다 먹어치우고 이젠 부족할 지경이 되었다. 한국에 가서도 고여사가 싸온 고추장멸치볶음, 청양고추 멸치볶음, 김, 진미채 볶음이 생각날 것 같았다.
고여사와 말없이 불을 바라보며 한참을 있었다. 이렇게 에메랄드 레이크 로지에서의 고요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불을 바라보다가 견딜 수 없이 졸려서 일찍 잔 탓이다. 역시 고여사는 이미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 우리 조식 먹으러 가자. 어제 조금 먹고 잤더니 배고프네."
나는 어제 프런트 데스크에서 받은 조식 쿠폰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쿠폰이 2장 나왔다. 1인당 1장인 줄 알았는데, 디자인이 서로 달랐다. 자세히 보니 1장은 2인 조식, 1장은 2인 저녁식사 쿠폰이었다.
이럴 수가... 이걸 왜 제대로 안 봤지? 이거 있었으면 어제 그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던 거네?
"엄마... 이거 하나는 조식 쿠폰이 아니라 저녁 쿠폰이었어. 우리 어제 거기서 저녁 먹을 수 있었네. 아 어떡해 너무 아까워. 이거 프로모션이었나 봐."
"아이고 그걸 잘 봤어야지. 왜 잘 안 봤어. 너무 아깝다."
"아니 나는 2장 주니까 당연히 1인당 1장인 줄 알고 제대로 안 봤지.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너무너무 아쉬웠다. 특히 어제는 유난히 그 식당에서 먹고 싶었는데, 잘만 봤어도 그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는데. 속상했다.
조식을 먹으러 가니, 어제 그곳이 조식 뷔페로 차려져 있었다. 가짓수는 많지 않았지만 음식이 하나하나 다 맛있었다. 사방에 난 창으로 에메랄드 레이크가 훤히 보였다. 뷰까지 환상이었다.
경치가 멋지고 음식이 맛있을수록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제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쿠폰을 잘만 확인했더라면…
분명 상쾌한 아침이고 모든 게 다 좋은데, 속이 상해서 즐길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어제 그냥 거기서 저녁 먹을걸. 쿠폰의 존재를 모르고 돈을 주고 먹더라도.
어제 레스토랑에 가지 않은 건, 그냥 있는 거 먹고 오늘부터 캐나다 친구랑 맛있는 거 먹고 다니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벽난로가 있는 근사한 숙소에서는 그에 걸맞은 식사를 하고, 그래야 두고두고 회상할 추억이 완성되는 것이니.
조식을 다 먹고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고여사는 이미 깔끔하게 짐을 다 싸놓은 상태였다. 이제 내 너저분한 짐만 챙기면 되었다. 캐리어 지퍼를 닫는 순간까지도 아쉬웠다. 그 모습을 보던 고여사가 말했다.
"아 그만 잊어버려. 이미 지나간 일인데 할 수 없잖아. 다음부턴 잘 보고 확인해. 우리는 나중에 더 맛있는 거 먹자. 너무 서운해하지 마."
숙소에 짐을 챙겨서 놓고, 체크아웃까지 시간이 남아서 에메랄드 레이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어느 지점을 가도 호수와 설산과 전나무의 풍경이 기본이었다. 평화라는 단어를 시각화하면 딱 이렇겠다 싶었다. 날씨가 쨍하게 맑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하얀 구름이 두껍게 내려앉은 풍경도 정말 멋졌다.
고즈넉하고 평온한 이곳에 또 한 번 올 수 있을까? 그때도 고여사와 함께였으면, 그리고 꼭 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