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오전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고여사는 책상에 앉아 공책에 뭘 쓰고 있었다.
"엄마 뭐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여행 경비 정리하고 있었어."
"뭘 벌써 정리해? 돈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매일 해놓지 않으면 까먹어."
행정실 경리 출신이라 그런지, 고여사는 돈 계산하고 지출 계획 세우는 걸 엄청 좋아한다. 여행 와서까지 이럴 줄이야. 난 저런 게 너무 귀찮다. 나는 누굴 닮았을까. (아빠?)
공용 주방에 있는 토스터기에 식빵을 굽고 잼 몇 개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커피는 엄마가 가져온 맥심. 커피는 역시 맥심이지. 향이 아주 구수하구먼.
"엄마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조건 가야 하는 곳이 어딘 줄 알아? 금문교야. 오늘 우린 금문교에 갈 거야."
"그래 좋아."
"엄마 혹시 가고 싶은 데 없어?"
"없어. 너 가는 데로 다 따라갈 거야."
"그럼 거기 가기 전에 브런치 먹을래? 내가 옐프에서 찾은 데가 있거든. 거기 들렀다 가자."
"좋아."
숙소를 나와 전철을 타러 갔다. 오클랜드 역에서 샌프란시스코 St. Montgomery 역까지 12분. 다리 하나 건너면 된다. 오클랜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전철은 텅텅 비어 있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뉴욕에서는 전철에 늘상 사람이 많았는데. 샌프란시스코는 뉴욕보다 덜 복잡한 느낌이었다.
마마스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맛집에서 줄 서는 건 똑같구나. 그래도 일찍 가서인지 30분 정도 기다리니 우리 차례가 왔다. 에그베네딕트랑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를 시켰다.
"엄마 어때?"
"내 입맛엔 좀 짜."
"그래? 난 맛있는데. 엄마, 당분간은 미국 맛에 익숙해져 봐."
미국 사대주의자인 내 입에도 좀 짜긴 했다. 처음 몇 입은 맛있더니, 먹을수록 느끼했다. 하지만 고여사 앞에서 티 낼 수는 없지. 애써 맛집이라고 찾아왔는데 남기면 나의 선택 미스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기어이 끝까지 꾸역꾸역 먹었다. 속이 느글거렸다. 팁을 계산한 후 돈을 지불하고 나왔다. 김치가 생각났다. 아니면 단무지라도.
밖으로 나와 조금 걸었다. 저만치 서점이 보였다.
"오, 엄마. 저기 서점 있다. 들렀다 갈까?
"그래, 좋을 대로."
친구랑 왔으면 서점에 들르자고 못했을 것이다. 황금 같은 시간에 웬 서점? 하지만 엄마는 괜찮았다. 엄마도 서점을 엄청 좋아하니까.
어렸을 때, 고여사는 날 데리고 서점에 자주 갔다. 딸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책을 읽고 싶어서. 고여사는 나를 어린이 책 코너에 데려다주고 본인은 이 책 저 책 들여다보며 서서 읽었다. 한 시간은 기본이었다. 그러고는 나올 때 책을 한두 권 샀다.
고여사는 동네 도서관, 책 대여점, 이동 서점(당시 다마스에 책을 싣고 다니면서 빌려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등 책 빌려주는 곳은 몽땅 섭렵했다. 외할머니 댁 커다란 책장에 빼곡한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고 했다. 오빠도 어렸을 때 책을 끼고 살았다. 나는 둘에 비하면 책을 읽는 축에도 못 꼈다. 오로지 아빠만 TV를 보았고, 책만 읽는 우리 셋을 못마땅해했다.
"너무 책만 읽으면 현실 감각이 떨어져. TV도 좀 보고 그래라."
지금은 오직 나만 책과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엄마는 이제 라디오나 TV를 주로 틀고 지낸다. 오빠는 1년에 책 한 권 읽을까 말까다. 그는 이제 미드랑 웹툰만 본다.
일찍부터 서점에 정을 붙여서일까? 뉴욕에 갔을 때도 서점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2017년 여름, 뉴욕 <퍼블리셔스 위클리> 본사에서 일할 때 퇴근하고 매일 서점에 갔다. 처음엔 심심해서였다. 나중에는 궁금해졌다. 서울보다 임대료 부담이 높은 뉴욕에서 이 작은 서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당시 나는 네 번째 회사를 퇴사했고, 더 이상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별다른 재주가 없는데 회사 없이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 왠지 뉴욕의 독립서점들-independent bookstores, 말 그대로 독립이다-에게서 그 노하우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을 응원하는 마음과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배우고 싶어 스물 세 곳의 서점을 방문하고 관계자를 인터뷰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다녀왔습니다_뉴욕 독립서점> 책이다. 이를 계기로 평생 남의 글만 만질 줄 알았던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출판사를 창업해 10종의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너 책 맘껏 보고 와. 난 여기 앉아 있을게."
고여사는 서점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렇지. 고여사가 아무리 서점을 좋아해도, 영어책만 가득한 서점이 재밌을 리 없다. 하지만 딸이 하는 일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줬다. 덕분에 샌프란시코에 있는 동안 몇 개의 독립서점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서점 몇 곳을 돌아본 결과, 샌프란시스코의 서점들은 뉴욕보다는 개성이 강하지 않은 것 같았다. 리서치를 하지 않아서 잘은 모른다. 그러나 서점 대부분이 '이곳의 명물이 되겠다!'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뉴욕에서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어떤 서점은 대낮에 디제이가 앰비언트 음악을 틀거나 직접 만든 다양한 굿즈를 팔기도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매력을 뾰족하게 갈고닦는다는 느낌은 크게 없었다. 뉴욕의 독립서점들이 책을 파는 장소로서의 매력을 마케팅 및 상품화하는 데 더 능한 것 같았다.
게다가 2곳의 서점이 사진 촬영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 관광 스팟이 되기보다 주민을 위한 서점이라는 정체성에 더 집중하려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다녀왔습니다_샌프란시스코 독립서점> 쓰나 했는데, 깔끔하게 포기했다. 오히려 여행의 정체성-모녀의 즐거운 여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고여사가 아무리 서점을 좋아해도 영어책만 가득한 서점 투어가 재밌을 리 없다. 딸 배려해서 오케이 한 거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3박 4일 내내 다니면 고여사도 싫어했을 거다.
<다녀왔습니다_뉴욕 독립서점>의 후속편을 언젠간 쓸 날이 오겠지. 기회가 되면 많이 돌아다니고 싶다. 샌프란시스코 독립서점, 런던 독립서점, 암스테르담 독립서점, 헬싱키 독립서점, 발리 독립서점, 몰디브 독립서점, 보라카이 독립서점, 이비자 독립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