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1-12주차 생각정리
태아보험을 알아보던 중 계약기간이 2023년에서부터 2053년이라는 부분을 보았다.
2053년이라는 숫자가 너무 낯설면서도 끔찍해서 나도 모르게 나즈막히 욕설을 내뱉고 파일을 꺼버렸다.
세상에 2053년이라니... 60대의 나라니...
요즘 출산율이 너무 적다는 식의 뉴스를 엄청 본다.
아니 나 같아도 안낳고 싶겠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임신 중이쥬?) 싶고 이왕 이렇게 된거 더 최악을 찍고 정신차렸으면 좋겠다.
그럼 어떤식으로 정신을 차려야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이 될까.
요새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생각을 종종한다. 무지의 장막이었나. 원래도 꽤나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개념이었는데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더 깊이 공감이 된다. 이 아이가 어떤 아이로 태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어떤 아이가 되든 존중받고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면 좋겠다.
아이가 신체적으로 뛰어나 (나나 남편을을 보면 그럴리가 없겠지만) 산업현장의 노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을 친절히 잘 상대해 콜센터에서 일할 수도 있을 것이고, 동성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모습이 될지 나는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삶이 보장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뤄진다고 한다. 곧 읽어봐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안의 모순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힘들다. 요새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으면서 장애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아서 유독 더 그렇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사회에서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서사를 만들어가면 좋겠는데, 막상 1차 기형아 검사를 앞두고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볼때 모순적이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른다.
이외에도, 난자를 지니고 있는 성별에게 필연적으로 손해일 수 밖에 없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사회적인 노력을 통해 그 손해를 상쇄해주지 않으면 교육받고 의식이 있는 현대의 여성들은 굳이 출산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성애... 제발 샷더마우스...ㅋㅋㅋ
서구사회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지금의 특성들을 갖추고 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아이들을 더 적게 낳아 더 건강하고 똑똑하고 부유하게 키우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위어드, 조지프 헨릭) 더 나아가, 더 똑똑해진 여성들은 본인들의 커리어와 인생을 일정 부분 포기하면서까지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적 구조상 임신과 출산을 오롯이 버텨내야 하는 여성과 육아를 담당하는 남성으로 어느 정도 부담을 나눠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부터라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야지 다짐하면서 1차 정밀검사도 무사히 잘 마쳤고 이제 정말 인간의 형체를 띈 생명체를 보게 되었다. 신기... 예전에는 진짜 애벌레 같았는데 (남편은 자꾸 젤리곰이라고 정정하는데 애벌레가 어때서... 진짜 애벌레 같은데...) 그새 확실히 머리라고 할 수 있는 게 생겼고 손가락도 보였다. 9월에 봅시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