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짠내나는 외벌이
그랬다. 어릴 때 부터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굳짜(돈이나 재물 따위를 쓰는데에 몹시 궁색한 사람이라는 뜻의 순우리말)라고 불렀다.
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당신이 가난하게 살아서 내가 이렇게 된 걸 왜 자꾸 나를 굳짜라 부를까?'라고 생각해왔다.
6살 때 부모님 두 분다 일하러 나가시고 4살 짜리 동생을 수퍼마켓 앞 평상에 앉혀놓고 다리를 일자로 벌려보라고 시키며 동네 아이들에게 100원씩 걷어 그 돈으로 끼니 대신 과자를 사먹었다.
어떤 이상한 아저씨는 그 모습을 보고 나에게 매일 500원을 줄테니 자기랑 잠깐 어디 좀 가자고 했다가 수퍼마켓 주인 아줌마가 그걸 보고 날 보호해준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담임선생님께서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 있어 무엇인지 어쭤봤고 그것이 통장이라는 것을알았다. 집으로 가서 엄마에게 같이 우체국에 가서 통장을 만들어달라 부탁하였고 6학년 졸업식에 저축왕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엄마를 따라 자주 갔던 미용실에서 '계'라는 것을 알게 되어 반 친구들과 '500원 계모임'을 만들어 몇 만원씩 융통하는 것을 담임에게 들켜 엄마가 학교에 불려오신 적도 있었다.
그랬다. 난 돈에 일찍 눈이 밝아서 방과 후 친구가 컵라면을 먹고 가자고 꼬셔도 주머니 속의 500원을 만지작 거리며 집에 갔고, 마지못해 그 친구가 거의 매번 컵라면을 사줘서 먹은 기억도 있다.
그때 그랬다. Give and Take가 뭔지도 몰랐고 무조건 돈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취업을 하고 자립하면서 여유있는 삶을 살게 되니 봉인이 풀린 듯 돈을 물쓰듯 쓰기 시작했다.
신용카드의 리볼빙 서비스와 현금서비스를 받은 적도 만만찮게 많았고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돈을 무조건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다. 깜냥에 간은 콩알만해서 백화점 옷은 사지 못하고 강남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나 동대문 등에서 보세옷과 잡화들을 저렴하다고 샀고 먹는 것도 질보다는 양이 우선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엔 드는 돈은 내 욕망을 채우는 임계치에 다달았을 뿐 정신 차렸을 땐 보풀이 가득하고 재봉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옷들과 헬리코박터균으로 드글대는 내 위장 만이 남아 있을 뿐이였다.
이건 아니다 싶어 소비 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태크 경험자들의 이야기와 서적들을 찾아보고 계획있는 소비를 하기위해 노력해왔다.
하하. 그런데 왠 걸.. 선천적인 건지 후천적인 건지 이 놈의 굳짜 유전자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퇴사 후 아기가 찾아와 경단녀가 되고 외벌이가 된 지금. 굳짜 유전자가 내 머리 속에 변형 시냅스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제사상 차림에 수고하고 고맙다는 아가씨의 말과 내 손에 쥐어준 돈봉투에 돈봉투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25~30만원 제사차림비에 비해 적은 돈을 보고 '맞벌이에 부부가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잘나가는 직장인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때는 현금 대신 상품권이 있는 것을 보고 '어디서 받은거.. 돌려쓰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직장인이였을 때는 '남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생각 뿐 그런 것은 전혀 따지지 않았는데 내 생활이 바뀌니 다시 본연의 굳짜 유전자가 내 생각을 조작한다.
돈에 관대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다. 그저 어떻게든 돈 앞에서 초라해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다.
굳짜 유전자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면 '샛복'이라도 같이 있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