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수집: 꿈
나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다. 버릴 시간 하나 없이 열심히 살아낸 날은 눈을 감았다 뜨면 날이 밝아 있다. 잠이 생활의 질을 몹시 좌우한다. 그러니 내가 꿈을 꿀 때는 몸과 마음이 피로하고 여유가 없거나 스트레스가 많아 선잠에 들 때다. 밤새 꿈나라를 헤매다가 알람 소리에 눈을 뜨는 그 기분, 그 기분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꿈속을 헤매다 눈을 뜨는 날엔 대개 꿈을 꾸었다는 느낌만 남고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가끔 너무 강렬해서 일어난 후에도 계속 기억에 남는 꿈들이 있다. 그 꿈들은 대체로 잔인하거나, 무섭거나, 기분 나쁘거나, 어리둥절하거나,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긴 꿈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이 기억에 남는 날은 하루 일과를 소화하는 내내 꿈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원하지 않아도 곱씹게 된다.
그런 날에는 시간에 가속이 붙는다. 늘 반복하는 일상에 새로운 재미가 얹혔다고 볼 수도 있다. 현실과 픽션이 섞여 있는 꿈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현실 인물들의 경우엔 궁금해서 찾아보거나 연락해보기도 한다. 내용을 떠올리며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 셈해보기도 하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한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가지 꿈은 다음과 같다.
1. 집주인 할머니가 살인자였던 꿈.
할머니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집주인 할머니의 초대로 그 집에 놀러 간 나와 남편. 할머니는 우리와 다른 세입자 한 명을 살인의 타깃으로 보고 계속 관찰 중이었다. 다 함께 어울려 게임을 하는데 나는 계속 긴장된 상태로 할머니와 두뇌 싸움, 눈치 싸움을 벌이는 반면 남편은 해맑게 게임에 집중하며 자꾸 할머니의 심기를 건드렸다. 나는 할머니의 타깃이 남편이 될까 봐 식은땀이 주르륵. 그렇게 조마조마한 분위기 속에 게임을 지속하다가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나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속으로 '에잇, 저 눈치 없는 녀석!' 한 마디 했다. 아, 참고로 남편은 이 모든 것을 모른다. 아, 참고로 현실 우리 집주인은 할머니가 아니다.
2. 임신했을 때 꿨던 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에 방문했다. 현실과는 100% 다르게 넷플릭스 오리지널 <베르사유>에 나오는 베르사유 궁전처럼 천장이 높고 무척 화려한 궁전이었다. 현실 외갓집에 가면 외고조부모님, 외조부모님, 엄마와 삼촌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우리 사 남매와 사촌 동생들까지 모두의 사진이 벽 한 면을 메우고 있다. 꿈속의 외갓집에도 마찬가지로 가족들의 사진이 쭉 진열이 되어 있었다. 그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며 복도를 걷는데, 복도 끝에 황금빛의 커다랗고 낡은 문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위압감을 주는 그 문은 너무 열면 안 될 것처럼 생겼는데, 또 호기심 대마왕은 그런 문을 안 열어볼 수가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끼익- 열었다. 불이 꺼져서 캄캄한 사이로 주르륵 늘어선 샤워부스를 보고 '아 샤워실이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나의 뺨을 때렸다. 쫘-악. 그렇다, 이 꿈은 귀신에게 싸대기를 맞은 꿈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웃긴데 진짜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 깨어났다.
3. 용감한 시민이 된 꿈
어떤 건물 안에 있었다. 지하였는데 한쪽은 음식점이었고, 다른 한쪽은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였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맞은편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어떤 여자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불편해서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렇게 지하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입구에 남자들이 여럿 서 있었다. 형사들이었다. 강력계 형사들. 그중 한 사람도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 곁을 지나가며 통화 내용이 들렸는데… 아래에서 들었던 여자의 대화와 위에서 들리는 남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형사들이 잡으려고 찾고 있는 범인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결국 용감한 시민은 형사들에게 당신들이 찾고 있는 범인이 바로 저 지하에 있다고 알리고선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다. 용감한 시민이란 이런 기분인 것인가! 간담이 서늘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그렇다, 최근 <용감한 형사들>을 너무 자주 본 것이다. 이런 꿈은 제발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싶다.
4. 가장 최근에 꾼 꿈
남편과 아기와 함께 장시간 외출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꿈속의 우리 집은 마치 모래로 지은 아파트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구조도 매우 독특했다. 기존의 아파트와는 다르게 건물에 곡선이 많았고,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 집처럼 뜨끈뜨끈하다 못해 쪄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아기띠로 아기를 안고 남편은 양손 가득 짐을 든 채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우리 집이 있는 층에 도착해서 내렸는데, 짐을 잔뜩 든 남편은 그만 사람들에게 막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지 못했다. 짜증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복도는 말도 안 되게 넓었다. 복도에 들어서자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지 뭔지 네 명의 남녀가 수영복 차림으로 돗자리에 누워 썬텐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 복도를 꽉 매운 채 나란히 누워있는 그들에게 최대한 참으며 "지나갈게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들은 척도 안 하는 거다. 그래서 그들 사이를 뚫고 돗자리를 밟고 지나가다가 아기를 맨 채로 어떤 여자 위로 넘어졌다. 그들은 단체로 나에게 욕을 해댔다. 정말 열이 받은 나는 요즘 시대에 이따위로 개념 없이 아파트 복도에 누워있는 너희들이 정상이냐며 한껏 따져 물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야무지게 따져 물은 것 같다. 그리고선 씩씩대며 집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짐을 어깨로 잔뜩 맨 남편이 한껏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고 남편은 지쳐서 늘어진 꼴로 꿈이 끝났다. 사실 현실의 나는 굉장히 쫄보라 누군가에게 따져 묻는 일이 거의 없다. 속에 쌓인 것을 입으로 잘 내뱉지 못하는 편인데, 꿈에서는 마음껏 따져 물어서 어쩐지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몇 가지 더 기억에 남는 꿈들이 있지만, 너무 기분이 나쁘거나 불쾌하거나 민망해서 차마 쓸 수 없는 꿈들이다. 이렇게 내 기억 속에 저장된 꿈들은 이따금 생활하는 중에 불쑥불쑥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상상과 공상을 좋아했던 슈퍼 N인 나는 이 꿈에 살을 붙여보기도 하면서 지루한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꿈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남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밤새 꿈속을 헤매다가 깨어나 피곤하거나 꿈이 너무 강렬해서 일어나자마자 웃음이 나는 날에는 곧장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는 물론이고 그도 가끔 자신의 꿈을 나에게 들려준다. 제일 웃겨서 기억에 남는 꿈은 목욕탕 꿈이다. 꿈에서 눈을 떠보니 남편은 목욕탕에 알몸으로 던져져 있었다. 다른 차원에 떨어진 것 같았다는 그의 말.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씨름부 선수들이 다 같이 사우나에 온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접근해 그들 중 하나의 옷을 훔쳐 달아났다고 한다. 아, 다른 차원에도 씨름부가 있구나. 아, 선녀와 나무꾼이냐! 하며 깔깔 웃었던 아침이 너무 즐거워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참고로 다른 차원에서조차 목욕탕에 떨어진 나의 남편은 현생에서 목욕탕집 막내 아들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아기를 보다가 후다닥 출근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분유를 먹다 뻗은 아기와 아기를 보다 뻗은 남편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혹여 그들이 깰까 조심히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기가 깼다. 아기를 안고 근처 초밥집에 가서 테이크 아웃을 해왔다. 이번 주말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아기를 보느라 양껏 준비하지 못해 마음이 조급한 남편이 안쓰러워 특식을 산 것이다. 같이 맛있게 먹고 남편은 아기를 씻기고 나는 주방 정리를 시작했다. 주방 정리를 끝낼 때까지 아기는 잠에 들지 않았고, 결국 내가 빠르게 씻고 아기 침대로 가 간신히 재웠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곤 꿈에 대해 써 내려가며 혼자 낄낄거렸다.
그렇다. 나는 오늘 하루 정말 피곤했는데, 쉬질 못했는데, 꿈을 떠올리고 생각하고 적어내리다 보니 몹시 즐거워졌다. 꿈 또한 지루하거나 피곤한 하루에 작은 즐거움과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 꿈 또한 심심한 하루를 채울 수 있는 요깃거리가 될 수 있다.
***바라기는, 이 글을 읽고 생각나는 꿈이 있다면 꼭 나에게 당신의 꿈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발행한 뒤, 나는 기대하지 않는 척하지만 은근히 댓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곤한 오늘, 지루한 오늘, 심심한 오늘, 지친 오늘을 채운 요깃거리는 내 꿈이었으니 내일은 당신의 꿈을 요깃거리로 삼자. 너무 궁금하다, 당신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