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수집: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
“그는 수년 전에 고령에 마당이 있는 작은 커피숍을 열었다. 그는 커피를 내리는 행위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커피를 내리는 행위에 깃든 마음을 좋아했다. 그것은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마음일 것이다. 삶은 얼마든지 우리의 가슴을 찢어놓을 것이므로.” -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p.99
책을 읽다 메모를 해두고 여러 번 읽은 구절이다. 위 구절의 “그”는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유가족이다. 삶이 가슴을 찢어놓는 경험을 깊이 한 그는 자신과 같은 슬픔을 가진, 재난 참사 현장의 유가족 옆에 서 있는 딸을 잃은 엄마다. “그”인 “황명애 씨”의 삶과 그곳에서 건져낸 단어에 대한 정혜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위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삶이 이미 가슴을 찢어놓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따듯하고 구수한 향이 나는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이 문장을 통해 나에게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남았다.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은 꽤나 어려운 마음이다. 기뻐하는 마음은 대게 내가 쌓아 올렸거나 거둔 무언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노력, 버텨낸 시간, 그로 인한 결과에 기뻐하는 마음이 손쉽게 진심이기는 어렵다. 삶의 깊이가 깊을 대로 깊은 고수라면 모를까. 그런데 삶이 얼마든지 우리의 가슴을 찢어놓을 것이기 때문에 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라는 정혜윤 작가의 말이, 아직 삶의 하수인 나에게도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이 위로의 한 갈래가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진심으로,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
여기서 “남의 기쁨”은 비단 내가 아는 사람의 기쁨에서 그치지 않는다. 황명애 씨가 내리는 커피를 받아 드는 사람으로는 아는 이를 넘어 모르는 이까지 포함될 것이다. 어떤 창작물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슬픔을 겪은 황명애 씨의 삶과 그를 바라보며 쓴 정혜윤 작가의 글을 읽으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멋진 문장을 뒤쪽에 방점을 찍은 채 읽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슬픔과 상실에 둘러싸인 이들을 위해 자주 낭독하는 이 문장을 기쁘고 즐거운 사람들을 위해 동일하게 낭독해야 한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절망적 이게도, 나는 언제 진심으로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는가 생각해 보았을 때, 쉬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이들에게 일어난 좋은 일에 기뻐했지만 그게 정말 100% 기쁨이었을까? 기뻐하는 마음 뒤에 숨은 부러움, 질투, 아니꼬움, 속상함, 낙담, 무관심. 모든 사람을 나와 경쟁자이거나, 경쟁조차 되지 않는 사람 둘 중 하나로 분류해버리는 사고방식을 거두지 않고서야 100%의 기쁨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발견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삶이 짓궂은 장난으로 마음속을 상상할 수 없이 헤집어 놓은 사람들일 테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볼 수 있듯이, 기쁨과 슬픔은 늘 공존해야만 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은 “남의 슬픔을 슬퍼하는 마음”과 동의어이고,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사람은 남의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슬픔이 삶을 관통한 사람들 앞에서 더욱 겸허해지는 것은, 그저 그들의 슬픔을 가늠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슬픔을 견뎌내는 것에 더해, 다른 이들로서는 알 수 없는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이라는 정혜윤 작가의 말에, “커피 내리는 행위”와 그 행위에 “깃든 마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커피를 내리는 행위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이다. 알아차릴 새도 없이 커피를 내리고, 마시고, 내리고, 마시는 작은 행위 속에도 어떤 마음이 깃든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의식하지 못한 채 하는 모든 행위에도 어떤 마음이 깃든다. 커피를 내리는 행위는 도보를 걷는 행위,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 행위,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 인사를 하는 행위 등 어떤 행위도 될 수 있다. 그 행위에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면 누구의 가슴이든 삶이 가슴을 찢어놓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것을 통해 또 다른 필요한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이것은 위로를 창조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위로에는 늘 “받는다”는 수동적인 동사가 붙는다. 그런데 일상의 행위에 정성껏 마음을 깃들이다 보면 나와 타인에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마음을, 필요한 순간에 위로를 창조해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삶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