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수집: 그린티
‘나’를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면서 원하는 만큼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다. 자신을 표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냄새다. 외관에 있어 특정한 머리 모양이나 일관된 옷 스타일이 시각적인 시그니처라면, 냄새는 후각적인 시그니처다. 특정한 향수를 오래 쓰는 사람은 사람들 틈여 섞여 있어도 냄새만으로 그의 존재를 식별할 수 있다. 마치 회사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향수 냄새만으로 특정한 동료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은 냄새로 다른 사람에게 각인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고유한 나’를 표현하는 한 가지의 방법으로 향수, 바디미스트를 뿌리거나 핸드크림을 발라 나에게 원하는 냄새를 입힌다.
향의 세계는 넓고 거대하지만 내가 평소 지니는 향은 단출하다. A 브랜드의 대표 향인 ‘그린티’다. 같은 향으로 향수도, 바디로션도, 바디 미스트도 사용할 수 있어 좋을뿐더러 중저가 브랜드이기에 가격에도 부담이 없다. 20대 초중반부터 사시사철 일관되게 뿌려온 그린티는 사실 싱그러운 여름이 떠오르는 냄새다. 이제 막 취향이 생겨나는 시기인 20대 초반에는 계절에 맞든 맞지 않든 내가 좋아하면 된 거라며 사계절 내내 그린티를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가니 코끝이 시린 겨울에 상쾌한 녹차 냄새를 맡을 때마다 콧물이 고드름이 되는 기분이 들었고, 결국 추운 계절을 위해 새로운 향을 들였다. 마치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찾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새로운 겨울 향수는 달달한 바닐라 향과 장작향이 매력적인 S 브랜드의 ‘9PM’이다. 모 연예인이 사용한다고 해서 유명해진 이 브랜드는 런던에 있는 윔블던 숲의 향을 흘러가는 하루의 시간에 따라 담았다고 한다. 새벽 6시의 향, 오후 3시의 향, 저녁 9시의 향 이렇게 세 가지의 향이 대표적인데 전체적으로 취향에 잘 맞아 모든 향을 핸드크림으로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
나의 향의 세계가 단출한 이유는 일관되게 우드 향이나 잎을 담은 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새로운 냄새를 찾았다고 말해보지만 또 우드, 또 잎이다. 자주 사용하는 핸드크림과 바디미스트, 향수를 포함하여 룸 스프레이나 필로우 미스트, 핸드워시 등 냄새가 나는 모든 것은 우드 향 또는 잎 향이다. 간혹 달달한 꽃 냄새가 나는 제품을 선물 받기도 하지만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화장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거나 그대로 유통기한이 지나버린다. 이쯤 되니 내가 원래 이런 향을 좋아하는 건지, 고집스럽게 스스로를 세뇌해서 좋아하기로 결정해 버린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나는 왜 이런 냄새들을 좋아할까?
지난 2019년 Mnet에서 방영한 <퀸덤>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겁게 보았다. 마마무, AOA 등 2~3세대 여자 아이돌 그룹이 '한 날 한 시에 새 싱글을 내는 컴백 전쟁'이라는 설명이 붙은 이 프로그램은 한 마디로 걸그룹 무대 경연이다. 매 회마다 시원한 가창력과 멋진 무대 퍼포먼스들이 좋아서 본방송을 놓쳤어도 다시 보기로 꼭 챙겨보았다. 다양한 무대 중 당시 이슈가 되었고 내 기억에도 강렬하게 남은 무대는 AOA의 <너나 해>였다(본래 마마무라는 걸그룹의 노래인데 경연을 위해 AOA가 불렀다). ‘여자 아이돌은 이래야지’라는 편견을 깨부수듯 AOA는 노출이 하나도 없는 정장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섰다. 그 모습 자체도 멋있었는데 그보다 더 멋졌던 것은 원곡에는 없는 리더 지민의 랩 파트 가사였다. “솜털이 떨어질 때 벚꽃도 지겠지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AOA가 무대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이 가사에 담겨 있었다. ‘솜털이 떨어질 때’는 나이가 찬 때 일 것이고, ‘벚꽃이 진다’는 것은 걸그룹으로서 절정기를 지나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뜻 일게다. 여성은 꽃이며 걸그룹은 어릴수록 유리하다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과 편견에 맞춰 져버릴 꽃이 되지 않겠다고, 나는 나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얼마나 주체적인 모습인가! 나는 이 가사와 무대에 충분히 설득당했고 <퀸덤> 방영 시기 내내 AOA를 응원했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가 이 가사를 기억하는 까닭은 내가 지니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각에, 편견에, 참견에 맞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삶. 내 삶의 주체는 나임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 내 마음속에 있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생각과 결심들을 “I’m the tree”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 같아 지금도 노래를 듣고 무대를 보면서 속이 시원하다.
‘나는 왜 우드 향, 잎 향을 좋아할까’를 생각하다가 “I’m the tree”까지 향했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향을 입히면서 ‘나는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라는 메시지를 주변에 전한 것은 아닐까? 억지 같아도, 사실이 아닐지라도 상관없다. 이제 내가 우드 향, 잎의 향을 좋아하는 이유가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향수를 뿌리고 핸드크림을 바르면서 “I’m the tree”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나무의 뿌리처럼 내 두 발을 땅에 단단히 심고 서서 주체적으로 살자, 그렇게 다짐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잃지 않고 초심을 회복하기 위한 좋은 장치로 ‘냄새’를 선택하기로 했다. 꾸준히 좋아하는 향을 삶에 들이고, 맡을 때마다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점검하다 보면 내 삶 위에 더 단단히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