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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ey Dec 15. 2023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와 라탄 트레이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얼마 전, 외가 식구들은 6년간의 병간호 끝에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자고 결정했다.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양원에서는 요양병원에서 한 달 정도 치료를 받고 돌아오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6년간 누워계셨던 까닭에 몸 여기저기에 욕창으로 인한 상처가 많아 담당 요양보호사가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요양병원에서 한 달 정도 치료를 받고 몸이 괜찮아져서 오시면 상황이 한결 나으리라는 말에, 할아버지의 거처는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요양병원으로 옮긴 이후, 엄마는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놓는 대신, 둘이 있던 집에 혼자 남은 할머니가 혹여 우울증에 걸리지는 않을까 예의주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요양병원에 가신지 고작 일주일 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일하는 중에 엄마에게서 소식을 들었다. 분명히 좋아지고 있다고 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바로 전 주일, 교회에 가지 못하신 할머니를 위해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잠시 병원에 들렀다. 엄마는 아기가 춥고 힘드니 당신만 빨리 할아버지를 뵙고 오겠다고 서둘러 다녀오셨다. 그리고 이틀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소식을 전하며 엄마는, 주일에 너희도 같이 올라갈 걸 그랬어, 하셨다. 마지막으로 아기를 보여드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놀람과 슬픔도 잠시, K-장녀1인 엄마와 K-장녀2인 나는 각자의 해야 할 일을 했다. 엄마는 서둘러 삼촌들을 불러모아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빈소를 마련했고 장례에 관한 일 처리를 했다. 나는 일터에 경조 휴가에 관해 문의했다. 목요일에 예정되어있는 라탄 공예 프로그램은 빠질 수가 없었다. 목요일에는 일터에 나와야 했다.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에게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전했고, 동생들은 각자의 직장과 학교에 경조사 제도를 알아본 뒤 집으로 모였다. 문제는 막내였다. 고3, 유일한 미성년자인 막내는 이틀 뒤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누군가는 막내를 돌보고 시험 당일 도시락을 준비해주어야 했다. 상의 끝에 막내와 아기, 두 미성년자를 내가 맡기로 했다. 모두가 정신없는 3일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슬하 세 남매를 두시고 그 세 남매가 총 8명의 자녀를 둔 덕에,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밝고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친지들은 높은 목소리로 안부 인사를 나눴고, 오랜 시간 앉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 밝은 분위기 틈으로 슬픔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고 죄송함도 있었고, 무엇보다 상처가 있었다. 3일 내내 장례식장에 상주했던 동생에 의하면, 늦은 밤 문상객이 없을 때 가족끼리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그 안에는 어쩔 수 없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녀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옛날 사람 그 자체였다. 고집이 셌고, 할아버지의 말이 가정 안의 법이었다. 엄마와 두 삼촌에게 할아버지는 든든한 울타리이자 너무 곧고 단단한 존재였다.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던 그 시절 가장의 모습 그대로. 이제는 50-60대가 된 자녀들은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슬픔과 함께 지난 세월 받은 상처들을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털어놓았다.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입관을 할 때 곧게 누워계시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빳빳하게 묶여서 관으로 들어가시던 모습.

발인을 마치고 모두가 화장터로 떠날 때 나는 라탄 공예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늦지 않게 강사님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신청자가 오지 않아 그 자리를 메울 겸 라탄 트레이를 함께 만들었다. 재료는 인도산 등나무였다. 바닥이 될 단단한 판자에 길게 재단한 나무를 끼운 다음 서로 엮어 모양을 만들었다. “나무는 뻣뻣해서 적시지 않으면 부러집니다. 앞에 있는 스프레이로 충분히 물을 적셔가며 엮어주세요.” 강사님의 설명에 따라 칙칙 분무기로 물을 뿌려 나무를 적시며 라탄 트레이를 완성했다.



3일간의 긴 일정을 마침내 끝내고, 완성된 라탄 트레이를 손에 들고 귀가했다. 아기를 재우고 가만히 앉아 지난 3일을 복기했다. 엄마의 전화, 장례식장으로 가던 길, 조문을 와준 고마운 사람들, 동생의 수학능력시험, 컨디션이 좋지 않던 아기, 사촌 동생들과 오랜만에 둘러앉아 낄낄거리며 함께 먹은 컵라면. 부모와 조부모에게 상처받은 자녀들의 이야기와 부러지지 않게 물을 뿌려가며 완성한 라탄 트레이. 만일 할아버지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어쩌면 뻣뻣한 성격에 누군가 물을 칙칙 뿌렸다면 가족들이 조금은 덜 상처받았을까? 사실 할아버지의 성격은 그의 자녀들이 물려받았고, 손자 손녀가 물려받았다. 엄마는 고사하고, 나에게도 할아버지의 ‘그런 성격’이 내재해 있으니 말이다. 강한 주관, 단단함, 원칙주의, 고집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성격’으로 인해 나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상처를 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상처를 받는 사람은 대개 가까운 가족들이다. 할아버지 이하 단단하고 뻣뻣한 우리 가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있다. 엄마와 외삼촌들이 할아버지에게서 느꼈던 서운함은 사실 내가 엄마에게, 사촌 동생들이 두 외삼촌에게 느꼈던 서운함과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리 서운함은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도 열심히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강씨 집안 족보에 물을 한 바가지 끼얹어야 하나, 하다가 깨달았다. 아, 나 강 씨 아니지. 강 씨든, 김 씨든, 박 씨든, 홍 씨든 다른 가족들도 다 그렇겠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을 오셨던 엄마의 지인은 조용히 말했다. “장례식장이 아니라 잔치하는 집 같아요.”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였다. 우리 집 사 남매와 사촌 동생들은 마치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 거실에서 뛰어놀았던 것처럼, 그렇게 할아버지 가시는 길 앞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아기의 존재도 한몫했다. 할아버지가 생전 만난 유일한 증손주인 지우 또한 조문객들에게 안겼다가, 장기자랑을 했다가, 손을 잡혔다가, 웃기도 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남편을 여읜 할머니와 아버지를 여읜 강 씨 삼 남매는 서로의 식사를 챙기고, 잠을 챙기고, 가족을 챙겼다. 바빠서, 삶이 힘들어서, 각자의 말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한 시간과 관계의 공백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할아버지께서 가는 길에 후손들에게 물 한 바가지 시원하게 뿌리신 건 아닐까? 남은 가족들은 물 뿌린 등나무처럼 유연하게 서로를 대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상상을 해보며 모쪼록 우리 집 강 여사님과 그녀의 어머니, 두 동생이 남은 시간 젖은 등나무처럼 유연하게 서로를 대하기를, 그렇게 더는 상처받지 않고 서로의 시간이 잘 얽혀 강 씨 집 안의 트레이가 곧고 예쁘게 잘 완성되기를 바란다. 강 씨는 아니지만, 강 씨의 피가 흐르는 나 또한 사랑하는 우리 가족의 평화에 작게나마 일조하기를. 그렇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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