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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현 Sep 28. 2022

일상 잡설

1. 내가 좋아하는 일상의 순간들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재생산 노동은 끝이 없고 노동의 결과는 오직 하지 않았을 때에만 드러나며, 반복해야 하는 일이다. 긴장된 달리기 모드의 스위치를 끄고, 오로지 일상생활 위주의 삶을 살아보니, 그런 반복적인 일상이 주는 회복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하루 일과 중 나의 최애 목록 중 하나는 '볕 좋을 때 베란다에 빨래 널기'. 햇볕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빨래를 널고,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안정감, 행복감, 기대감, 만족감 등이 차오른다


내가 유난히 이걸 좋아하게 된 데에는 어떤 기억이 연관되어 있다. 대학 때 내게 어두운 지하에서 살다가 아파트에 사는 후배 집에 놀러 갔다. 후배 방에서 한낮의 해가 비치는 창문 커튼이 바람에 솔솔 날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언제 다시 이렇게 해와 바람이 드는 방에서 살아보나, 나도 이런 곳에서 아침에 눈 뜨고 싶다. 햇볕과 바람의 소중함, 절실함이 각성되어 뇌리에 각인된 기억이다. 그 소중하고 절실한 것이 내게 주어졌다. 그것이 기쁘고 감사하다. 


2. 마음의 습관에 대한 깨달음


짝꿍이 아침에 이웃 동네를 산책하다가 만난 초등학생 등교 풍경


"단짝 친구를 기다렸다가 만나서 같이 가는 장면, 친구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장면, 남녀 단짝이 손을 꼭 잡고 등교하는 장면,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고 장면..." 짝꿍은 이 풍경을 한참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내는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수를 안정시키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가져다주는 ASMR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소리를 녹음해서 내게 파일로 보내줬다.  


녹음을 들어보니 각종 소음과 왁자지껄한 아이들이 내는 소리가 합쳐져 일종의 불협화음 오케스트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짝꿍이 묘사하지 않는 소리도 많았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떼쓰는 것처럼 징징거리는 소리(학교 가기 싫어서?), 큰 소리로 친구를 부르는 소리, 어른끼리 뭐라고 말하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가는 소리, 아이들이 수다 떠는 소리...


이런 소리를 들으니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반복적 일상에서 맛볼 수 있는 안정감, 행복감, 평화 그런 것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짝꿍한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을 '남녀 관계'로 상상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들어보니 학교에 함께 가려고 동성 친구를 기다리던 여자 아이의 사랑 고백이었다. 그 순간 내가 나에게 내 마음의 습관을 들켰다. 처음에는 짝꿍한테 전해 들은 초등학생들의 사랑 고백의 당사자를 이성애로 상상했고, 나중에 사랑 고백을 주고받은 단짝 친구들이 여자였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그것이 '로맨틱한 감정'이 아니라 '우정'으로 여겼고, 그리고 곧바로 그것이 내 마음의 습관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남녀 간의 사랑 고백은 '연인' 관계이고, 동성 간의 사랑 고백은 '친구' 관계로 간주하는 내 마음의 습관 말이다. 


어린이를 바라보고 보살피고 키우는 일이 주는 행복감과 깨달음은 부분적으로 불예측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 등굣길, 전해 들은 풍경에서 내 마음의 습관을 자각하게 된다. 


3. 요즘 내가 몰두하는 일


요즘 내 취미 중 하나는 우리 동네 지도 만드는 일이다. 각종 맛집 지도 외에 요즘 내가 몰두하고 있는 것은 동물 병원 지도이다. 인터넷 마을 카페에 수시로 드나들며 동물 병원에 대한 평판을 조회하고,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어떤 일로 병원을 드나들고 무슨 문제로 고민하는지를 탐색한다. 


각종 개와 관련된 자료를 섭렵하면서, 개를 키우는 일은 진작 포기했다. 한적한 숲에서 개와 함께 사는 삶은 나의 로망인데, 이생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내가 동물 병원 지도를 만들고 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른다. 그냥 재미있다. 내가 이러는 건 신이 나를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는 덕후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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