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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현 Jan 22. 2023

다큐 영화 <부활>, <어른 김장하>

- 가능성의 정치학, 티가 나지 않는 일에 관한 잡설

최근에 본 다큐 영화 두 편, 구수환 감독의 <부활>, 경남 MBC가 제작한 김현지 감독의 <어른 김장하>. 두 영화는 여러모로 닮았다. 


<부활>은 고 이태석 신부가 작고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고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과 한국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담아낸 영화다. (고 이태석 신부는 생애 마지막 8년을 아프리카의 남수단에서 내전으로 몸과 마음이 조각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한편, <어른 김장하>는 평생 한약방을 운영해서 번 돈을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한 한약사 김장하의 삶을 조명한다. 


두 영화 모두 이태석 신부와 김장하의 보살핌/도움을 받거나 그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인터뷰 참여자들이 가톨릭의 '성인' 또는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질 만큼 큰 존재인 고 이태석 신부와 김장하 선생을 닮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은 그 선한 영향력의 크기를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것이다. (고 이태석 신부의 제자가 의사가 되어 한센인 마을에 찾아와 같은 방식으로 진찰했을 때, 환자는 "이태석 신부님이 오신 것 같다"라고 했고, 그 장면을 보고 구수환 감독은 '부활'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 두 영화에서 내 눈에 들어온 공통점은 따로 있다. 두 영화의 스토리텔러, 구수환 감독(부활)은 KBS 시사 프로그램 PD 출신이며, 김주완(어른 김장하)은 경남 지역 언론의 기자 출신이다. 구수환과 김주완은 평생 각자 언론의 비판적 기능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비리를 추적하고, 고발하고, 감시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애쓰며 살아온 언론인 출신이다. 


중견 언론인으로서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다지 바뀌지 않는 현실에 언론인으로서 깊은 좌절감 또는 무력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부활>의 스토리텔러 구수환과 <어른 김장하>의 스토리텔러 이수완은 언론인으로서 자기 효능감을 되찾고 싶은 열망이 가장 클 때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태석 신부와 김장하의 삶이 보통 사람에게 얼마나 깊고 큰 울림을 줄 수 있는지, 그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부활하게 되는지 알리는 일이었다. 


'큰 사람'의 존재를 목격하고, 기억하고, 닮고 싶게 만드는 새로운 열망과 정서로 많은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각성시키는 그런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차별, 불의,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언론이 비판적 역할과 함께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 명민한 김현지 감독(어른 김장하)이 그 지점을 포착한 것이 아닐까 싶다. 

 

<후기 자본주의 정치학 A Postcapitalist Politics>(2006)이라는 책의 저자 Gibson-Graham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무엇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정동(affect)을 각성시켜 사람들을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내는 정치학을 일컬어 "경제적 가능성의 정치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시니어 학자인 저자들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왜 이런 주장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언론인 출신의 김주완이 '자기 효능감'이라고 말한 것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즉 비판적 언론인으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을 때 간절해지는 느낌. 비판 이론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때 내가 느꼈던 기분이다. 스포츠인권 관련 작업을 하면서 인권을 가로막는 엄청난 벽, 문제 상황에 대한 진단과 정책 방향에 대한 제언이 나온 후에도 10년 이상 같은 자리를 맴도는 현실. 아주 짧게 활동했을 뿐인데도,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싶지 않은 심정이 들었다. 지금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영역에서 인권적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기억하고, 사람들이 그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이 두 개의 다큐 영화는 그런 필요를 채우는 큰 흐름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 원래 비판적 작업은 티가 잘 나지 않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언론인이건 학자건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판은 감시의 기능으로서 역할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비판이 살아있는 사회는 부조리의 재생산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이 번식하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고 본다. 티가 잘 나지 않는 일, 그래서 내가 하는 일에서 자기 효능감을 찾기 어려운 일, 비판은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본다. 비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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