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넘도록 친해지지 않는 단어 '한인'
미국에 처음 오게 된 건 LA의 작은 라디오방송국 기자 인턴십을 통해서였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전공했지만 방송에 좀 더 관심이 있었던 터라 당시의 나는 '기사'라는 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 기본이 하나도 잡혀있지 않은 상태였다. 인력이 매우 부족했던 회사는 이런 나를 바로 업무에 투입시켰다.
취재는 어떻게 하는지, 기사 언어는 무엇인지, 어떤 뉴스가 중요한지 모른 채 시키는 대로 냅다 쓰기 시작했는데, 유독 국장님이 내 기사에서 매번 고쳐 쓰시는 단어가 있었다.
‘한국인’이었다.
국장님은 늘 한국인을 ‘한인’으로 고쳐 쓰셨다. 초창기 내 머릿속에는 '한인'이라는 개념은 없고, '한국인' 혹은 '교포'라는 구분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왜 저걸 고쳐 쓰시지?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전혀 미국과 미국의 한인 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민 국가인만큼 정말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아간다. 멜팅팟(Melting Pot)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에서 살다 보니 인종(Race)과 민족성(Ethnicity)에 대해 굳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지만, 미국에는 이 두 개념이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단순히 국적(Nationality)의 문제를 넘어서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성과 유전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 인종에 따라 커뮤니티가 구성되기도 하고, 한인타운, 차이나타운처럼 특정 민족이 모여 작은 타운을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인타운에 사는 한인들만 해도 그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나처럼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이민 온 1세,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이민 온 1.5세, 미국에서 태어난 2세, 3세까지. 신분으로 보자면 유학생을 비롯해 각종 비자 신분이 있을 것이고, 영주권자, 그리고 흔히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서류미비자까지 굉장히 다양한 부류가 있다. 이들을 어떻게 누구는 한국인, 누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구분을 하겠는가? 그렇게 따로 지칭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들의 법적 신분을 물어보기도, 다 알기도 어렵다. 이들을 통틀어 '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통점은 본국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라는 점. 이상하게도 같은 한국계라는 이 공통점은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결속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타인종보다도 못한 관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인들은 '같은 한인’들에 대한 관심이 무지하게 많다는 거다.
선배들은 기사의 중요도에서 첫째가 ‘한인’과 관련된 소식이라고 했다. 통신사 뉴스를 검색하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나오거나 Korean이라는 단어가 있으면 무조건 번역해 기사화해야 한다고 했다. 기사 제목은 무조건 'LA 30대 한인 남성, XX 범죄 연루' 이런 식이다.
강력범죄나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졌다고 하자. 그 피해자 혹은 용의자가 ‘한인’이었을 때, 한인들 사이 그 파장은 굉장히 크다. 또 지진이나 홍수, 산불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그 지역 한인들을 돕기 위해 같은 한인들이 발 벗고 나선다.
한인이라는 단어의 힘이다.
이 단어가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붙을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나의 정체성은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을.
사실, 한인=한국계를 지칭하는 단어이니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정체성의 일부 아닐까 싶으면서도, 소외되어 버린 나의 정체성을 어느 곳에서라도 소속되도록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러면서도 참 이율배반적인 것이, 나 자신이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한인이란 말 자체가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미국의 문화가 어느 정도 스며들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속력도 사실 한국인보다는 덜한 느낌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같은 한국인이면 떡이라도 하나 더 주고, 하나라도 더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같은 한국인을 상대로 나쁜 짓을 벌이는 사람도 많다. 물론, 어딜 가나 나쁜 사람들은 있겠지만, 오죽하면 '같은 한국인은 더 조심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겠나.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어느새 한인이라는 단어에 약간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더해진 것 같다.
내가 Fob을 나의 닉네임, Fresh off the Bae로 소화한 것처럼, 한인의 정체성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이 오겠지…
나의 닉네임 탄생기는 여기서!
https://brunch.co.kr/@freshoffthebae/3
커버 이미지: Photo by Daniel Bernar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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