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두려운 나
밤은 늘 두려웠다. 불이 꺼지고 방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차면, 세상이 나를 버리고 멀어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는 순간, 내 삶이 뚝 끊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잠이 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불안이, 몸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차올랐다.
책을 붙잡고 버티며 밤을 밀어냈다.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불 꺼진 방이 무서워서 밤새 활자를 따라갔다. 문장을 붙드는 동안엔 시간도 붙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하면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끝내 더 깊어지는 밤을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 나는 책을 손에서 놓고 쓰러지듯 잠들곤 했다. 나는 왜 그렇게 밤을 싫어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내던져지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가끔은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일을 할 때도 있다. 밤에 잠을 자는 것이 싫었던 나는 밤에 일하는 것을 즐겼다. 대신 낮에는 좀비처럼 흐릿한 눈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노란 원피스 하나로 망쳐버린 아침이 있었다. 평소 엄마 말에 순순히 따르던 내가, 그날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노란색이 너무 눈에 띄는 게 싫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그냥 평범하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아이로 남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예쁜 옷을 왜 입지 않느냐며 화를 냈고, 나는 단 한 번 솔직한 내 마음을 말했을 뿐인데 매질이 돌아왔다.
나는 울면서도 버텼다. 그 노란 원피스를 입지 않겠다는 작은 고집 하나만은 지키고 싶었다. 엄마는 결국 내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기고, 마당 한가운데 세워두었다. 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매질을 해댔다. 평소에 학교 가던 길에 들러서 같이 가자고 하던 사촌 오빠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매를 맞는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그 시선들이었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피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무력감이 나를 덮쳤다.
동생은 나중에 말했다.
“그때 언니는 돌처럼 굳어 있었어.”
그날 이후, 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사는 게 더 안전하다고 믿게 되었다. 내 생각을 말하면 돌아오는 건 꾸지람과 매질뿐이라는 걸 배워버렸다. 나는 점점 눈치를 보게 되었고, 정작 내 감정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나조차도 내 마음을 외면했다. 내 말이 세상에 닿는 순간, 그것은 언제나 내게 되돌아와 상처가 되었다.
성인이 된 뒤, 그 이야기를 동생과 나누며 한참을 웃었다. 그날 아침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길고, 고된 아침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눌려 있던 감정이 터지듯 이상한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동생의 말을 통해,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들을 들었다. 내가 겪은 일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기억을 일부러 지워왔다는 것을. 내 기억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이 더 나를 안쓰럽게 했다.
지난 기억을 다시 꺼내는 일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나를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건 내 안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 아이를 다시 품어주는 일과 같다.
엄마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당시 일본에 있던 외할아버지는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집안의 무거운 짐은 할머니와 어린 엄마의 몫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엄마는 네 살에 제주로 돌아왔고, 친구도 없이 ‘준짱’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놀림을 받으며 자라야 했다. 엄마의 삶도 늘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이해한다. 엄마 역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해져야 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그날의 모멸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기억은 내 안에 남아, 지금도 밤을 두렵게 한다. 불이 꺼지고 방 안이 캄캄해지면, 나는 다시 그 노란 원피스 앞에 선 아이가 된다. 대처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무력하게 서 있던 그 아이. 아무런 대응도 못 했던 그 시절의 나와, 잠이 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리는 지금의 내가 닮았다. 밤은 여전히 나를 멈춰 세운다. 아무리 일찍 자야지 다짐해도 창이 밝아오는 걸 바라보며 눈을 감을 때가 많다.